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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출신입니다만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인호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문송합니다.’ 인터넷이나 TV에서 가끔씩 나오는 말이다. 무슨 뜻인지 처음엔 생소했다. 이젠 대부분의 사람이 사용하는 신조어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이 말은 ‘문과여서 죄송합니다.’의 줄임말이다. 단순히 말장난만은 아니다. 포털사이트의 시사상식사전에도 당당히 이름이 올라있을 정도. 인문계 졸업생들이 특히 취업하기 어려운 현실을 이르는 말이다.
대학을 보자. 과거 지성의 상징이었던 국문과, 영문과, 철학과, 사학과 등의 ‘문과’ 계열의 학과들은 하나둘씩 폐지되고 있다. 국문과는 ‘굶는과’라 농담하고, 사학과는 ‘역사문화콘텐츠학과’로, 회화학과는 ‘비주얼 아트학과’등의 해괴한 이름으로 바뀌고 있다. 언제부턴가 문과가 홀대받게 된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의 가와무라 겐키. <전차남>, <기생수> 등의 영화를 제작했다. 첫 소설이 초대박을 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소위 성공한 문과인이다. 이 사람과 ‘문송’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콤플렉스가 있었나 보다. ‘이과 콤플레스’.
‘이과에서 완전히 도망친 줄 알았는데 다시 붙잡혀 버렸다.’ 결국 나는 이런 생각에 다다랐다. 진실을 알고 싶었다. 상황을 바꾸고 싶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만약 내가 그러기를 바란다면 ‘이과로부터 배우는’일에서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4쪽)
그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2년간 이과의 선두 주자들을 만났다. 허투루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질문하고 배웠다. 거기서 더 나아가 혼자만의 깨달음으로 남겨 두지 않았다. 그 만남들은 많은 사람(특히 문과인)들을 위한 열매로 맺혀졌다. 바로 『문과 출신입니다만』라는 책.
그중 인공지능 연구 선구자인 ‘마쓰오 유타카’의 대담이 인상 깊었다. 그는 인공지능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주목할 분야로 ‘딥러닝’을 언급한다. 딥러닝은 인간과 한없이 유사한 자율 학습형 인공지능이다. 이미 화상인식 부분에선 컴퓨터의 정확도가 인간을 넘어섰다고 한다. 유타카는 말한다.
인공지능이 많이 활용될수록 인간은 더 인간다운 직업에 특화될 수 있고, 그 덕에 다양성이 있는 수준 높은 사회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어와 프로그래밍은 이제 됐으니 인간다움을 길러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127쪽)
과학의 척도를 잴 수 있는, 인공지능. 그 부문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그의 대답은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인간다움’이라니... 왠지 기술이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논해야 할 것 같은데... 인간다움을 다루고 있는 문과의 영역이 반드시 필요함을 대담자들은 힘있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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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 책이 부담스러웠다. ‘읽기에 어렵고 생소하지 않을까?’는 걱정 때문이었다. 기우였다. 문과가 알지 못하는 이과의 측면을 훔쳐보았다고나 할까? 작가가 만난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 해부학자, 미디어 아티스트, 이론물리학자, 외과 교수... 그들이 펼쳐 놓는 이야기는 내 귀를 즐겁게 했다. <슈퍼마리오>의 배경이 하늘색인 이유, 대체자원으로서의 연두벌레, 화성에 갈 인류의 모습 등...
또한, 나 역시 문과인이기에 작가의 시점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작가의 질문이 내 질문이었고, 작가의 깨달음은 곧 나의 깨달음이었다. 마지막 사람의 대담까지 읽은 후, 머리말에서 말한 작가의 결론이 이해되었다.
처음에 나는 이과와 문과의 차이를 알려고 했다. 문과에 있고 이과에 없는 것. 이과에 있고 문과에 없는 것. 그 차이를 통해 각각이 해야 할 일을 찾아내려 한 것이다. 그러던 중에 깨닫기 시작했다. ‘이과와 문과는 똑같은 산을 다른 길로 오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5쪽)
결국 이과나 문과는 매한가지 아닌가. 이 사실을 철저히 이과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작가는 깨달은 것이다. ‘틀림’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이었다. 어느 한쪽이 틀린 게 아니라 단지 다른 것일뿐임을 새삼 깨달았다.
장난처럼 유행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 ‘문송합니다’. 실적과 성과만을 찾는 시대에서 어쩌면 위축되어 버린 문과인들. 그들의 처진 어깨를 향해, 아무 생각없이 이과인들을 동경했던 나를 향해 한마디 하고 싶다. ‘문과라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