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용서해야 하는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원마루 옮김 / 포이에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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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한 소년의 운전으로 아들 마이클을 잃은 남자. 아버지의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정의의 심판은 더디었다. 법정에서 운전자의 혐의를 밝히는 데만 일 년이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가해자의 어머니는 법정 최고형을 요구했다며 비난조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그 소년은 법의 심판을 받았다. 6개월의 교정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그 뒤 6년 동안 집중 관찰을 받는 조건으로 가석방되었다.

 

아들을 잃은 남자는 이후로도 극심한 분노에 휩싸였다. 법으로 정의가 실현되었지만, 아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했다. 가해자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하지만, 그는 용서의 길을 택했다.

 

용서’. 어쩌면 TV에서도, 책에서도, 사람들 사이에서도 많이 쓰이는 단어이다. 주기도문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기독교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용서라는 말은 묵상하면 할수록 가벼운 단어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내가 용서의 현장, 즉 내게 해를 끼친 사람 앞에 있다면, 용서는 상상할 수 없을 무게로 다가온다.

 

왜 용서해야 하는가. 브루더호프 목사인 요한 크리스토퍼 아놀드가 용서에 대해 썼다. 내게 해를 끼친 사람과 상황 속에서, 힘겹게 용서를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십대 폭력으로 딸을 잃은 어머니, 아버지에게 아동 학대를 받아 온 여성, 인종차별을 겪어 온 아프리카계 미국인, 르완다 사태에서 친한 친구에게 부모님을 잃은 뮤지션, 학교 폭력과 집단 따돌림을 받은 한국 소녀...

 

용서를 선택한 이들의 리스트이다. ‘정말 이 사람도 용서해야 합니까?’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힘겹게 용서를 선택한 과정을 담았다. 책을 읽는 내내, 이들의 가정과 일터, 삶의 현장을 방문해 직접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생생했고, 때로는 강렬했다. 앞에 언급한,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자.

 

용서의 길은 길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가해자뿐 아니라 마이클을 용서해야 했고, 일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둔 하나님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용서해야 했습니다. 그게 가장 어려웠습니다. 저 역시 술을 마신 상태로 마이클을 태우고 운전한 적이 많았으니까요. (94)

 

그의 말처럼 책에 소개된 다른 사람들도 용서를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용서했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질타를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용서를 선택한 이들은 삶의 큰 보석을 발견해 간다. 다시 아버지의 말이다.

 

우리가 바라는 사건의 은 결국 용서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용서의 힘은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고, 용서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94)

 

다른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 십대 때, 크리스는 유괴범에게 머리에 총을 맞았다. 기적적으로 뇌는 다치지 않았지만, 한 쪽 눈이 실명했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분노하고, 어떻게든 복수를 꿈꾸는 것이 당연할텐데, 크리스의 선택은 용서였다.

 

사실, 제가 그를 용서한 이유는 아주 현실적이에요. 피해를 입으면 사람들은 흔히 복수와 용서 중에 하나를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복수를 선택하면 분노하는 데 삶이 다 소진되고 맙니다. 복수는 일단 하고 나면, 사람의 마음을 텅 비게 하는 위력이 있으니까요. (109)

 

상처를 입고, 그럼에도 용서를 택한 사람들. 이들의 가슴 먹먹한 이야기를 이 책은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좋은 미담을 모아 적은 책이라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쭉 들으며, 질문 한 가지를 던질 수 있었다. ‘저 상황에 놓였을 때,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용서가 결국엔 내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막상 그 상황에 놓인다면, 내 앞의 가해자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신중히 묵상하고, 용서에 대해 이전과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면, 이 책은 결국 나를 위한 선물이었다.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이 송곳처럼 계속 마음을 찔러 온다. 사실, 내게 조그마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었다. 나는 용서하지 못했다. 이 책을 읽은 바로 다음 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용서가 정말 어렵구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작가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용서가 반드시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 역시 연약하며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용서를 경험할 때에만 용서할 수 있는 큰 힘을 얻게 된다. (145)

 

왜 용서해야 하는가?’ 독자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 작가는 책 마지막에 이렇게 당부한다.

 

우리의 손에는 용서에 이르는 열쇠가 쥐어져 있다. 그 열쇠를 사용할지 안 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264)

 

용서, 생각보다 사용이 쉽지 않은 열쇠. 그럼에도 이 책의 많은 사람들은 기꺼이 용서를 선택해 서서히 회복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들의 가슴 먹먹한 목소리를 오래토록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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