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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 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이자 여러 종교의 핵심이다. 그런 이유로 사랑을 주제로 수많은 소설이 쓰였고, 영화가 만들어졌다. 너무 많이 쓰여 이제는 퇴색된 것만 같은 단어이기도 하다. 그런데, 또 ‘사랑’이다. 바로 공지영!
사실 그동안 공지영은 좋은 필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사회의 문제를 뚝심 있게 밝힌다는 이유였다. 끊임없는 SNS 홍역에 시달렸던 것은 기본, 남다른 가정사까지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럼에도 우직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줄이지 않았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는 뜨거운 감자, 사형제도를 다루었으며, 『도가니』를 통해서는 묻혀 있던 장애우의 인권 문제를 수면 위에 띄웠다. 해직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을 담은 르포르타주 『의자놀이』도 강렬했다. 그런 그녀가 5년 만에 자신의 장기인 소설을 갖고 돌아왔다. 『높고 푸른 사다리』.
‘한 수도사의 사랑’. 한 구절로 이 소설을 정의할 수 있겠다. 요한 수도사는 소희라는 한 여인을 사랑한다. 수도원 밖과 안의 사랑이다. 통용될 수 없기에 더욱 안타깝다. “이 세상과 나의 생이 그녀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나누어지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무채색에서 단번에 유채색의 세계로 전환되었다.”(p.193)
수도사의 사랑? 어쩌면 너무 익숙한 내용일 수도 있다. 어디선가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다. 다행히 ‘수도사의 사랑’이라는 낯익은 퍼즐 옆에 작가는 또 다른 퍼즐을 맞춰 놓았다. 희한하게도 그것 역시 ‘사랑’이다. 수식어를 하나 붙여 보자. ‘타인에 대한’ 사랑.
이 소설에는 주인공 요한 수사를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미카엘, 안젤로, 토마스 수사. 이들은 다양한 목소리로 타인에 대한 사랑을 대변한다. 특히 미카엘은 철탑 위의 여성 노동자를 비롯하여, 성장의 한복판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의 외침이다. “나는 사랑에 대해 말하려고 했던 거야. 작고 가난한 형제에 대한 사랑…….”(p.113) 비슷한 문제들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이 시대를 비추는 것 같고, 미카엘은 작가의 모습과 겹쳐 온다.
이성에 대한, 또한 타인에 대한 사랑이 날줄과 씨줄처럼 엮여 이야기를 고조시킨다. 그런데, 갑자기 탁한 무언가가 사랑의 베틀에 스며든다. ‘사랑’이 배반한 듯 보인다. 푸르고 푸른 강물처럼 순수했던 수도사의 사랑, 그 사랑이 깨어진 것이다. 이미 요한은 신에게 귀속되었고, 소희에게도 그녀를 기다리는 남자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결정체, 미카엘과 안젤로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사랑은 이처럼 덧없는 것인가?’ 읊조리며, 남은 소설을 읽어 내려가다 마지막 퍼즐을 발견한다. 역시 ‘사랑’이다. 이번 사랑에 붙는 수식어는 ‘인류를 위한’이다. 주위 인물들과의 사랑을 말하던 작가는 소설이 끝나갈 무렵, 범인류적인 사랑을 덧붙였다.
그 사랑이 꽃피운 현장은 바로 한국전쟁,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다. 수많은 전쟁터에서도 구원이 시작된 곳은 바다 한 가운데, 그곳에는 각종 기뢰가 매설되어 있었다.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아비규환, 그 속에서 한 외국인 선장의 결단과 헌신으로 14,000명의 한국인은 목숨을 구하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압니다. 할 수 없는 이유 9999가지를요. 그러나 합시다. 이건 생명의 문제입니다. 이건 흥정의 대상도 고려의 대상도 아닙니다.” (p.334) 미친 짓이라며 그런 명령은 수행할 수 없다던 선원들에게 외친 선장의 말이다. 역시 작가의 목소리로 들렸다. 이 선장은 나중에 수사가 되어 종교에 귀의한다. 마리너스가 그의 이름이다.
감동은 있지만, ‘너무 작위적으로 끝나지 않았나?’ 생각하며 책장을 덮으려는 순간, <작가의 말> 한 구절이 나를 휘감았다. ‘이 소설의 배경에는 세 사람이 서 있다. 첫 번째는 두말할 나위 없이 마리너스 수사님이다. 그에 대한 내 모든 소설의 서술들은 아주 작은 각색을 제외하면 고스란히 사실이며 실은 내 전언보다 훨씬 더 극적인 일들이 그 안에 잉태되어 있다.’ (p.375)
영화와도 같은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니…. 실제로는 더 극적인 일들이 있었다니…. 소설의 마리너스 선장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진실의 힘, 역사의 힘이 느껴졌다. ‘진실이었기에 그렇게 더 울림을 주었구나. 역사속의 사건이었기에 그렇게 더 생생하게 표현되었구나!’
영감 있는 예술가는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발견하는 법이다. 그 좋은 전범이 이 소설이다. 사랑이라는 흔한 소재를 잘 버물려서 깊은 맛을 내는 음식을 만들어 준 공지영 작가, 그녀에게 박수를 보낸다. 살기 각박하다고 외쳐대는 이 때, 좋은 소설 한 편은 깊은 울림과 함께 세상을 견디어내는 힘을 준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푸른 사다리를 선사할 작가의 펜을 응원한다. 희망으로 올라가는 ‘높고 푸른 사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