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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 영혼이 향기로웠던 날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안내하는 마법
필립 클로델 지음, 심하은 옮김 / 샘터사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다른 사람의 기억이 없는 새로운 장소, 전적으로 몰개성적인 공간으로서의 호텔 방에 들어선다. 불편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와 반대로 여행자, 즉 순전히 이동하는 존재로서의 자질이 강화된다. 우리는 호텔 방에서 우리 삶의 은유들을 좀 더 발견해야만 한다. (53쪽, '호텔 방')
누가 호텔 방에 대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우리가 매일 마주치고, 지나치는 일상. 그 일상의 면면을 세밀히 관찰하고, 일상이 풍기는 향기를 전한 이가 있다. 바로 프랑스의 유명한 문학가이자 영화감독 필립 클로델. 그의 공감각적 산문집 『향기』가 찾아 왔다.
아카시아, 마늘, 구운 베이컨, 곰팡내, 전나무, 하수 처리장, 노인, 교도소, 교회, 잠든 아이…. 작가는 유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가 경험했던 물건, 장소들을 현재로 소환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사물에 얽힌 경험을 나눈다. 작가에겐 한 순간, 한 순간이 중요했고, 사물 하나 하나가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 ‘마늘’에 대한 그의 추억은 이렇다.
할머니는 재봉가위를 가지고 스테이크 위에 파슬리를 조금 떨어뜨려 섬세하게 장식해 작품을 마무리한다. 싱싱한 허브 향이 풍겨 나온다. 그러고 나면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할머니는 안 먹어요?”
내가 물으면 할머니는 대답해 준다.
“네가 먹는 것만 봐도 난 배가 부르단다.”
할머니는 내가 여덟 살 때 돌아가셨다. (15쪽)
많은 음식에 들어가는 ‘마늘’. 작가는 이 마늘을 볼 때마다 할머니가 떠올랐을 것이고, 그래서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많은 독자들에게 우리 곁에 있지만 소중함을 몰랐던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짙은 그리움을 선사한 것이다. 작가는 작은 사물을 통해 세계관을 피력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양배추’.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지속되는 냄새. 요컨대 너무나 흔한 나머지 다른 향기가 그 냄새를 흉내 내어 그 정체성을 빼앗고야 마는 냄새.
사실상,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아마 그 때문에 오랫동안 아무도 아닌 이들의 식사였을 것이며 그들의 피부에 달라붙었을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비난당하고 추방당한 약자.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는 그런.
나는 오랫동안 여전히 양배추 냄새가 나기를 바란다. (70쪽)
시 같기도, 에세이 같기도, 아니면 개인의 일기장과도 같은 『향기』. 짧은 글들이지만, 문장 하나 하나는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진한 향기가 배어 나온다. 아마도 작가의 인생 순간순간에서 깊이 길어 올린 생각과 감정이라 그럴 것이다. 한번 주위를 돌아보자.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사물과 순간에서 놓치고 있는 비범함은 없는지.
글자 하나가 하나의 냄새를, 동사 하나가 하나의 향기를 품고 있다. 단어 하나가 기억 속에 어떤 장소와 그곳의 향기를 퍼뜨린다. 그리고 알파벳과 추억이 우연히 결합하여 조금씩 직조되는 텍스트는, 꿈꾸는 삶과 지나온 삶과 다가올 삶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경이로운 강물이 되어 흘러간다. 수천 갈래로 갈라지며 향기를 뿜으며.
(271쪽, ‘여행’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