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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부엉이
사데크 헤다야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5월
평점 :
진흙 속에
핀 연꽃 같은 삶, 한 예술가를 통해 본다
이란의
카프카,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P.7)
충격적인 하지만 매혹적인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 첫 문장에 송두리째 마음을 뺏긴 나는, 한번에 <눈먼 부엉이(사데크 헤다야트, 문학과지성사>를 읽어 나갔다.
하지만 쉽게 읽혀지진 않았다. 소설 전반에 걸쳐, 주인공의 슬픔과 절망, 죽음의 악취가 피어난다. 마치, 장례식장에서 계속
피어나는 향냄새처럼. '죽음, 무덤, 고통, 질병, 공포, 창녀' 등 작가가 계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은 이 세상의 온갖 슬픔과 좌절을
형상화하고 있다. 때로는 너무 잔혹한 표현이 눈살을 찌푸리게도 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 속엔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처럼.
눈먼 부엉이는 작가 자신?
주인공은 필통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그는 자기 자신 안에 갇힌, 철저히 고립된 존재를 그린다. 소설에 묘사된 그의 모습은 꿈과 현실을 오가고,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나는 마치 꿈속에서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로 어서 깨어나기를 원하지만,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P.28)
어쩌면 아편에 취한 주인공이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리라. 짧지만, 몽환적이고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 구조 탓에 나 역시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플롯이 엄청 조밀하게
짜여 있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이 인물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지?'라는 질문을 계속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책을 (무사히) 다 읽고 나서,
이 책의 줄거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읊는 것은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눈먼 부엉이>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름도 없다)은
작가 사데크 헤다야트의 자아였다. 작가는 이란의 대표적인 작가로 페르시아 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다.
헤다야트는 자신이 직접 남긴 기록을 통해 이렇게 소개한다.
"내 삶에는 그 어떤 눈에 띄는 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특별한 사건은 전혀 일어나지 않으며 흥미로운 요소라고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높은 지위에 있는 것도 아니며 확실한
학위를 가진 것도 아니다. 학교에서는 늘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이었고, 항상 패배하는 쪽이었다. 일하는 직장에서도 이름 없는 하급 직원에
불과했으며 상사들에게는 불만의 대상이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쉽게 잊히고 마는, 그런
인간이었다." (p.178, 옮긴이의 말)
무력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헤다야트. 그는 작가의 예술적 성향을 지지하지 않는 고국의
정치적 현실에 깊이 실망한다. 그는 페르시아 문학을 서구적 형태로 발전시킬 꿈을 갖고 있었지만, 시대는 그의 꿈에 부응하기에 아직 많이 낙후되어
있던 것이다(p.180). 결국 1951년 4월, 체류 비자 연장을 거부당한 뒤, 파리에서 가스를 틀어놓고 자살한다.
제3세계 문학의 아름다움
헤다야트 삶의 팔할이었던 슬픔과 좌절, 무력함이 <눈먼
부엉이> 전반에 걸쳐 흐른다. 하지만 작가는 단순히 자신의 우울한 모습만을 담긴 것은 아니다.
"무정하고 냉혹하게 삶은 모든 인간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겨버린다.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뒤집어쓴 채 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면은 당연히 더러워지고 주름이 생기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인간은 계속해서 그것을 쓰고 다닌다.(p.136)"
작가는 가면을 대부분의 인간이 쓰고 다닌다고 표현한다. 이 책은 1900년대 초반(1937년)에 써졌지만, 지금 이
시대와도 잘 부합된다. 자신을 감추기 위해 그리고 점점 암울해져 가는 세상을 보지 않기 위해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가면이
냉혹한 삶에 의해 벗겨질 때, 우리는 얼마나 큰 고통을 맛보게 되는가. 물론 가면이 벗겨졌을 때, 순전한 진실을 맛보게 되는 상은 있을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매일 얼굴을 대하면서 함께 어울려 살고 있는 이 인간들과 내가
너무나 다르며, 너무도 멀리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들과 내가 외모가 유하하며, 아주 희미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들과 연결의
끈을 유지하고 있음도 느낀다." (p.94)
어쩌면 주인공, 아니 작가의 제일 큰 좌절은 이 문장 안에 있지 않을까?
자기가 그토록 혐오하고 구역질나게 했던 '타인, 세상'이 결국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 사실이 더욱 처절한 슬픔이 아니었을까.
주인공에게 슬픔과 고통을 안겨 준 아내(창녀), 노인의 모습이 바로 자기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나는 거울 앞으로 가 섰다. 놀라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리고 말았다. 거울 속의 나는 바로
고물상 노인처럼 보였다." (p.171)
이처럼 이 책의 여러 문장에서 현실에 대한 명징한 비판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볼 수 있다. 한편 소설가 배수아씨의 번역은, 번역했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수려하고, 깔끔하다. 그녀의 멋진 번역 덕에 읽는 맛이
더했다. 역시 번역이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다.
너무 염세적인 작가의 세계관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세계관도 다양한 색깔과
생각의 스펙트럼을 넓혀 주는 귀중한 것이리라. 아울러 영미 소설과 일본 소설에 편중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문학 시장에도 이같이 다양하고 수준 높은
3세계 문학들이 소개되고, 읽혀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