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거품 펭귄클래식 52
보리스 비앙 지음, 이재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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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월의 거품>을 알기 전 <무드 인디고>라는 영화를 봤다. 이 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였다. 프랑스어만 들으면 잠들어버리는 나는 화려한 영상미와 나긋한 프랑스어 속에 5번을 내리 잠들었고, 6번째 시도에서야 겨우 영화를 끝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커졌다 작아졌다, 빨간색이었다가 파란색이었다가 하는 영화 장면들과 아름다운 꽃들 정도가 내가 기억하는 전부다. 누구에겐 명작이라고 하는데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억울해서 책을 펼쳤다. 영화보단 더 많은 것들을 느끼길 원했다. 알록달록함을 넘어선 그 어떤 의미가 나에게 다가왔으면 했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오른쪽 폐에 수련이 핀다는 말을 정말 말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사실 이게 암이나 폐렴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임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굉장히 충격이었다. 마냥 판타지는 아니었구나 싶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내가 왜 이런 은유적 표현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문득 내가 소설은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서 계속 표현에 집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현실주의 작품임을 알면서도, 내가 아는 소설의 틀에 이 책을 억지로 끼워넣으려 노력하다 보니 이 책의 진가를 못 알아보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다시 읽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규격화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 만약 이 책을 처음 접한 나와 같이 읽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자꾸만 표현에 집착하게 된 사람이 있다면 부디 가지고 있는 소설의 틀을 잠시 내려놓길 바란다. 첫 장에서 여드름이 알아서 피부 속으로 숨어버릴 때 우리는 그 틀을 내려놓았어야 한다.

작품 해설에 적혀있듯, 이 책의 주인공은 콜랭이다. 칵테일 피아노로 돈을 벌고, 재즈를 즐기며 살던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그녀의 병을 고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자신이 가장 혐오했던 노동까지 하게 되는 이야기, 전적으로 콜랭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이야기는 ‘클로에를 위한’ 콜랭의 이야기다. 클로에에 대한 그의 사랑은 가장 혐오했던 노동 안에 자신을 집어넣을 정도로 짙다. 작품 해설을 읽다 깨달은 것은 클로에가 내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비앙이 실제로 의도하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당대 프랑스 문학의 흐름을 따라 읽다보면 클로에는 수많은 이중적 가치를 상징한다. 그런 가치를 탐닉하는 콜랭의 모습은 마치 낭만을 꿈꾸는 평범한 인간 같다. 통통 튀는 비극 연애소설 정도로만 생각했던 책이 가진 색다른 뜻에 주목하며 책을 곱씹으니 소름이 돋는 듯 했다.

개인적으로 영화보다 책이 훨씬 좋았다. 아마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영화를 보면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콜랭의 헌신에 감동했고, 까만 활자 속에서 다채로운 색과 통통 튀는 분위기, 그리고 아름다운 재즈를 발견했다. <무드 인디고>를 본 사람이라면, 혹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꼭 작품 해설과 함께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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