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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문화가 생소하면 문학 또한 생소할 수 있는데 생생하고 날카롭고 힘 있는 소설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영국침략으로 식민지가 되면서 가톨릭을 급하게 받아들였던 나이지리아의 왜곡된 종교관과 독립 이후 군사 쿠데타를 겪으며 국민들이 겪은 끔찍한 고통, 그리고 전혀 다른 전통과 관념을 가졌지만 한 객체로서의 소설 속 인물들이 우리와 얼마나 빼닮았는지를 실감나게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우리에겐 새 이름이 필요해>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이후 세 번째로 읽는 아프리카 문학인데 익숙한 영미문학과는 전혀 다른 신선한 묘사와 표현, 시각이 흥미롭다.
<엄마는 페미니스트>의 저자,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소설이라 당연히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지만 억압된 가부장제 속에서 침묵하던 소녀와 그의 오빠가 주체적인 자아를 찾아간다는 성장소설의 플롯을 그리고 있으니 영 아니라고도 할 수 없겠다.
나이지리아 토착어를 번역하지 않고 고딕체로 남겨놓았는데, 주제의식을 거들 뿐 아니라 소설에 개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마치 마법의 언어 같아서 유추하는 재미도 있다. 덕분에 나이지리아가 한층 가깝게 느껴진다.
소설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인물은 유진과 아마카. 정형화되지 않고 입체적인 인격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진보주의 신문사의 발행인이며 이웃들에게 베풂을 실천하는 아버지 유진이 가족들에게는 매우 고압적이고 가학적인 공포의 대상이라는 점. 그리고 시샘 많고 무례한 사촌 아마카는 가난하고 병든 할아버지의 묵은 발뒤꿈치를 속돌로 부드럽게 문지르고 바셀린을 발라줄만큼 다정하다는 점 또한.
🏷파파은누쿠는 아마카 때문에 자기 발이 너무 말랑말랑해지겠다고, 이제는 딱딱하지 않은 돌에도 발바닥이 찔리겠다고 불평했다. 여기서는 이페오마 고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샌들을 신지만 마을에서는 신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마카한테 그만두라고 하지는 않는다.
🏷“캄빌리, 너는 귀한 아이야.“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하는 사람처럼 감정이 북받친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너는 맹렬하게 완벽을 추구해야 한다. 죄악을 보고도 걸어 들어가선 안돼.“ 아버지가 주전자를 욕조 안으로 가져오더니 내 발을 향해 기울였다. 그러고는 마치 실험을 하면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고싶어 하는 사람처럼 내 발에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었다. 아버지는 이제 울고 있었다. 눈물이 얼굴을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수증기를 먼저 보고 그다음에 물을 봤다. 주전자에서 나온 물이 거의 슬로 모션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내 발을 향해 흐르는 것을 지켜봤다. 닿았을 때의 통증이 너무나 순연한 극열이라 일순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명을 질렀다.
자전적인가 싶을 정도로 세심하게 전개되던 이야기가 결말에서 급하게 마무리 된 것이 아쉽지만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읽었다. 나중에 한 번 더 독서모임 사람들과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우리나라가 지나온 민주화 과정을 투영해보고 전통과 진보 사이의 균형 잡힌 성장, 폐쇄적인 종교관 등 각자의 의견을 나눠 볼 발제거리가 많을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몇 번 시도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민주 정치를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마치 오늘날의 민주 국가들은 처음부터 잘했던 것처럼. 그것은 걸음마를 떼려다 엉덩방아를 찧는 아기에게 가만있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치 그 아기를 앞질러 가는 어른들은 기어 다녔던 시절이 없는 것처럼.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의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오빠와 내가 서로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아직도 너무 많다. 시간이 흐르면 더 얘기하게 될지도, 아니면 영원히 다 말할 수 없을지도. 오랫동안 벌거벗은 상태였던 것에 언어라는 옷을 입히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