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이 자신들의 사상사적 성취로 거푸 그들의 내부(혹은, 고진 식으로 말해 '내면')를 창출할 때, 우리는 기실 서양의 외부이거나 당최 그들의 내면으로 쉬이 환원되지 않을만큼 충분히 타자적일까? 박현채 등속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자생적 '심층근대화'의 가능성이 절맥된 채로 발밭게 서양의 이념으로 뒤발해 버린 지 오래다(하기야 근대화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서구의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서양사상사를 우리의 눈으로 일별한다는 거창한 기획은 차마 애석하다. 이를테면 칸트 식으로 말해 예의 '우리의 눈'이라는 것이 도대체 '백지상태'일 수는 없는 까닭이다. 에드워드 사이드 이후,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이 유행처럼 번성하기도 했지만, 우리의 눈은 '역사적 선험성'(푸코) 속에서 이미 '감각적인 것이 나뉘어'(랑시에르)진 채로 속절없이 굴절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의 눈으로 서양사상사를 일람한다는 기획은 다만 우리의 '선 자리'(sitz im leben)에서 우리의 일상에 맞갖게 서양의 이론을 내려앉히고, 그 이론의 쓸모를 우리의 현장에서 우리의 문체로 공글리는 작업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