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날개 ㅣ 위픽 클래식
이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6월
평점 :

✏️ 막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학습 자료가 아닌 소설로 읽는 『날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래서 고전은 시대를 넘어 읽히는가 보다.
✍️ 책의 구성은 여타 소설과 달리 말미에 '작품 해설'이 아닌 허연 작가의 '에세이'를 담고 있다. '이렇게 읽어야 해'가 아닌 소통하는 듯 느껴져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간혹 작품해설을 읽다 좌절할 때가 있었다...)
허연 작가는 에세이에서 작품 속 사내의 무기력한 모습에서 현대인의 동일한 병증을 읽어냈다. 세기의 틈사구니에서 기회와 소통의 부재에 자신의 서사를 잃은 채 무기력해 졌다고 진단하며, 소설을 통해 마취에서 깨어나 대오각성을 가능케 해준다고 보았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나는 어떤 에세이를 쓸 수 있을까? 나와 소설 속 사내는 어떤 점에서 같고, 어디서 달라질까.
나는 가장 게으른 동물처럼 게으른 것이 좋았다.
(...) 나에게는 인간 사회가 스스러웠다. 생활이 스스러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철없이 화자의 게으른 생활이 부럽더라. 화자가 시대의 한계에 끼여 졸도할 듯 무기력한 게으름이라면 나의 게으름은 평화로운 일상에서 오는 나태함에 가까울 것이다. 스스로 날개를 접고 새장 안에 들어가 맛없는 모이라도 만족하며 살 수 있다. 내가 먹은 것이 아달린이면 어떻고, 아스피린이면 어떤가. 어차피 날 수 없어 날개가 꺾인 채 박제된 것이 아닌가?
돈 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던 사내는 돈이 없다고 이불 속에서 울다가 어느 샌가 자본주의의 상징인 백화점 옥상에 올라 발아래 인간 사회를 두고 5월 햇살에 등허리를 따뜻하게 데우며 그릇 안에 든 싱싱한 금붕어를 바라보다, 다시 회탁의 거리로 나선다. 나서서 어디로 향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이불을 박차고 걸어 나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아내에 대한 미움은 사라졌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때 들리는 정오의 사이렌 소리에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번뜩였지만, 오늘은 날개가 없다. 인공의 날개가 다시 돋을 수 있을까? 자정의 시간을 비에 젖은 채 서성이던 사내는 정오의 하늘을 날게 될까?
현실 속 '이상'은 뭐라도 있으리라 희망하며 도쿄로 향했지만 가솔린 냄새 가득한 거리에 좌절하고 폐결핵으로 26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무엇이 이미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날아보고자 애쓰게 했을까? 한때 날개를 갖고 날아보았던 경험이 무기력하게 비틀거리는 사내를 다시 움직이게 한 것은 아닐까.. 짧은 소설을 몇 번이나 다시 읽고 쓰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굳었던 심장이 뛰는 게 느껴진다. 나도 나만의 동력을 찾아봐야겠다. 나를 날게 할 것은 과거의 기억일리 없으니, 이제부터 고민해 볼 문제이다. 인공의 날개를 달고 어디로 날아가고 싶은 것인지.
✍️ 소설이라기보다 시에 가깝다는 감상이다. 글 사이사이 빈 공간은 독자가 메워야 할 일인데, 기껍다. 나와 멀지 않은 과거에 같은 언어를 쓰는 이가 이런 멋진 작품을 썼다는 것이 뿌듯하다. 게을러 질 때마다 곁에 두고 보기 좋은 소설이다.
[위즈덤하우스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열심히 읽고 쓴 리뷰입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 P7
그러나 그것들은 내가 잠이 드는 것과 동시에 내 방에 담겨서 철철 넘치는 그 흐늑흐늑한 공기에 다-비누처럼 풀어져서 온데간데가 없고 한참 자고 깬 나는 (...) - P21
나는 이렇게 부지런한 지구 위에서는 현기증도 날 것 같고해서 한시바삐 내려버리고 싶었다. - P32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 P70
무기력은 현대인에게 단순한 정신적 피로를 넘어 내면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공백이다. - P80
이상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또 하나의 현대적 병증은 소통 부재다. - P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