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탄생 - 태초부터 고대 그리스·로마의 등장까지 지중해의 역사
사이프리언 브루드뱅크 지음, 이청규 옮김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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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델을 넘어, 지중해가 태어나는 순간을 만나다

며칠 전, 개인적으로 무척 의미 있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고대 지중해사를 다룬 책이다.

지중해 문화사와 관련된 국내 번역본은 웬만하면 다 소장하고 있지만, 기존의 책들은 대부분 인물과 사건 중심이었고 다루는 연대 역시 기원전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했다. 게다가 지리·지형적 접근을 시도한 책은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10여 년 전쯤 마포 창비 건물에서 열린 강연에서 어느 교수가 나의 이런 오랜 갈증을 풀어줄 만한 책을 언급한 적이 있다. 강연이 끝난 후 찾아가 제목을 물어보았고, 그때 알게 된 책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저자 페르낭 브로델이 쓴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였다. 당시엔 번역본이 없어 원서를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며 안타까워하다가, 다행히 번역본이 출간되어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 근본적인 갈증을 온전히 채워주기엔 살짝 미흡했다.

그런데 이번에 찾은 책은 그야말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격이다. 사이프리언 브루드뱅크(Cyprian Broodbank)의 《The Making of the Middle Sea》 — 이번에 번역된 따끈따끈한 책, 《지중해의 탄생》이다. 952쪽에 달하는 46배판의 웅장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도대체 이 책의 어떤 점이 오아시스라는 것일까.

브로델과 갈라서는 네 갈래 길

1. 다루는 시간적 범위와 선사시대의 비중 브로델의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는 16세기라는 고도로 발달한 역사 시대에 초점을 맞췄다. 그가 훗날 고대 세계의 지중해를 집필하긴 했지만, 주된 관심사는 이미 완성된 형태의 지중해 네트워크였다. 반면 브루드뱅크는 인류의 기원부터 기원전 500년 고전기 이전까지 — 즉 선사시대를 중심에 둔다. 브로델이 묘사한 상호 연결되고 역동적인 지중해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빙하기 이후부터 청동기 시대를 거치며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애초에 어떻게 빚어졌는지 그 근원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2.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이라는 과학적 혁명 브로델이 고대 지중해를 서술하던 1960년대 후반은 과학적 연대 측정법이 확립되기 전이었다. 그래서 그는 몰타의 거석 신전이나 서유럽 문화가 이집트·근동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동방 전파론의 오류에 갇혀 있었다. 브루드뱅크는 이 혁명을 적극 수용해, 이베리아나 몰타 같은 지중해 중서부 지역이 동방의 영향을 받기 훨씬 이전부터 독자적이고 자생적인 문명을 발전시켰음을 증명하며 옛 연대기적 오류를 명쾌하게 바로잡는다.

3. 기후를 바라보는 완전히 다른 시선 브로델에게 지리·환경 요인은 아주 느리게 변하는 장기 지속의 구조, 즉 인간의 역사가 펼쳐지는 고정된 무대 배경에 가까웠다. 반면 브루드뱅크는 빙하 코어와 해저 퇴적물 분석이라는 현대 기후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지중해의 기후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극적이고 빈번하게 요동치는 능동적 요인이었음을 강조한다. 기원전 2200년경의 급격한 건조화, 기원전 1200년경의 기후 변화 같은 단기적·극단적 변동이 인류의 생존 전략과 사회 붕괴, 대이주를 촉발한 핵심 변수로 다뤄진다.

4. 목적론에서 벗어난 '야만인의 역사' 브로델의 시각에도 유럽 중심적 뉘앙스가 일부 남아 있었다면, 브루드뱅크는 문명의 변방으로 취급되던 이들의 역할에 주목하는 '야만인의 역사'를 표방한다. 문명이 동방에서 출발해 그리스·로마라는 종착지로 향한다는 일직선적 역사관을 단호히 거부하고, 지중해 전역의 다양한 토착민들이 각자의 파편화된 환경을 극복하며 서로 거대한 그물망처럼 얽혀갔는지를 동등한 비중으로 서술한다.

요약하면, 브로델이 이미 완성된 지중해 네트워크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구조적으로 보여주었다면, 브루드뱅크는 현대 고고학과 과학의 힘을 빌려 그 복잡한 세계가 애초에 어떻게, 누구에 의해 탄생했는가를 요동치는 기후와 변방 사람들의 관점에서 재구성해 낸다. 이 지점이 가장 큰 차이이자 이 책의 압도적인 매력이다.

지중해사의 지형도 위에서

이 책을 지중해사 서가 전체 맥락에 놓아보면 위치가 더 선명해진다. 호든과 퍼셀의 《The Corrupting Sea》(2000, 국내 미번역)는 미시생태와 위험 분산이라는 이론적 메커니즘으로 지중해를 해부하고, 데이비드 아불라피아의 《The Great Sea》(2011, 국내에 《위대한 바다》로 번역)는 상인과 군주들이 벌인 인간 드라마로 같은 바다를 복원한다. 브루드뱅크는 이 두 책이 다루는 시대보다 훨씬 이전, 즉 '지중해라는 무대 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지형도의 가장 밑바닥에 놓이는 책이다. 여기에 주강현의 《해양실크로드 문명사》까지 얹으면, 지중해가 유일한 해양 네트워크의 정답이 아니라 여러 대안적 아키텍처(고밀도 메시형 지중해, 병목형 유라시아 초원길, 계절풍 펄스형 동남아 몬순 항로) 중 하나였다는 더 넓은 그림도 함께 보인다.

인류사의 네트워킹이라는 관점에서, 지중해사가 중요한 이유

브루드뱅크의 이 책을 개인적 감동으로만 남겨두기엔 아깝다. 지중해사는 단순한 지역사가 아니라, 인류사에서 '연결과 이동'이 어떻게 문명을 가속하는지를 보여주는 압축 실험실이기 때문이다. 이를 네 가지 축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지형·생태 결정론의 가시화 테티스해의 잔해가 빚어낸 험준한 지형과 극단적으로 파편화된 미시생태는, 인류에게 자급자족의 환상을 깨고 '연결과 이동'을 생존 조건으로 강제했다. 브루드뱅크가 추적한 선사시대 지중해는 바로 이 강제가 처음 작동하기 시작한 현장이다.

2. 전근대 프로토-글로벌화의 고속 믹서 챔버 대양이 거대한 단절선으로 작동하던 시절, 지중해는 가시거리 섬 건너기(island-hopping)와 해류를 타고 유전자, 흑요석, 알파벳, 질병까지 초고속으로 교류된 현장이었다. 다른 대양권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훨씬 촘촘하게 '연결'이라는 현상이 실험된 곳이다.

3. 위험 분산과 회복력의 동역학 단일 지역의 흉년이나 생태적 충격을 광역 재분배망과 항해술 혁신으로 돌파해낸 패턴은, 복잡계가 어떻게 충격에 적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실증 모델이다. 이 회복력의 원형이 브루드뱅크가 그린 선사시대 미시생태 네트워크에서부터 시작된다.

4. 문명 '운영체제'의 교차 증류소 페니키아의 상업 자본, 그리스의 폴리스 네트워크, 로마의 법·인프라가 충돌하며 범세계적 인프라 표준이 갱신된 용광로가 바로 지중해였다. 이 모든 후대의 '증류' 과정이 가능했던 것은, 브루드뱅크가 보여주듯 그보다 수천 년 앞선 시기에 이미 연결의 토대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중해가 인류 진화의 유일한 필수 경로는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메소포타미아-인더스, 황하-양자강, 안데스-메소아메리카 등 여러 문명 진앙에서도 독립적으로 압축적 도약이 일어났다. 지중해가 특별한 것은 '더 우월해서'가 아니라, 거대 단일 제국 대신 독립적인 행위자들이 약한 유대로 촘촘히 엮이며 시스템 복잡도가 비선형적으로 상승한 파편화된 다원성(fragmented polycentrism) 때문이다. 그 결과 알파벳, 화폐, 계약법 같은 '가벼운 표준'이 국가 주권과 무관하게 빠르게 생성·전파될 수 있었고, 적당한 해양 마찰력 덕분에 혁신과 실패의 검증 주기도 극적으로 단축됐다.

결국 지중해사가 인류사 전체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복잡계가 네트워킹을 통해 어떻게 가속하는가'를 가장 선명하게 뜯어볼 수 있는 벤치마크 해부대라는 점에서, 지중해사는 인류사 네트워킹 연구의 원형 사례로 다룰 가치가 충분하다.

학계의 반응 — 단순한 호평이 아니었다

이 책이 나왔을 때 학계의 반응은 예사롭지 않았다. 브라운 대학의 존 체리는 이 책이 곧바로 랜드마크급 저작이 되어 분야 전체에 변혁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 평했고, 또 다른 서평자는 이 책을 브로델의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이후 지중해사 연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성취라 부르며, 학자들이 자기 전공을 사고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놓을 것이라 단언했다. 무엇보다 Journal of Mediterranean Archaeology가 2014년 단행본 한 권을 두고 저자 본인에 더해 그레임 바커, 린 폭솔, 스터트 매닝 세 명의 중진 고고학자를 초빙해 공식 원탁 토론 코너를 편성했다는 사실이, 이 책이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보여준다. 브루드뱅크 스스로 "지식의 게토화"라 부른 문제의식 아래, 이집트학과 메소포타미아학처럼 분리돼 있던 고고학 전통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냈다는 점, 그리고 자료가 희소한 북아프리카에까지 이례적으로 공을 들여 지중해사를 유럽 중심 서사에서 끌어냈다는 점은 이후 연구자들에게 실질적인 방법론적 전환점이 되었다.

유려한 번역이라는 또 다른 미덕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번역이다. 원저자가 방대한 분량을 독자가 따라가기 쉽게 쓴 글을, 번역자가 매우 유려하게 다듬어 주었다. 번역을 맡은 이는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의 이청규 교수로, 전공이 고고학이라는 점도 이 책의 결을 정확히 짚어내는 데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마치며

지금 장안의 화제인 《오디세이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지중해를 알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저 눈부신 서사시도 지중해라는 무대가 없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생명현상이 그렇듯, 인간현상 또한 결국 지질적 표현이다. 언젠가 지중해에 갈 일이 있다면, 이 책을 읽고 가는 것과 읽지 않고 가는 것은 그 바다를 바라보는 눈이 전혀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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