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박물관이 세계를 구하는 법 - 대멸종의 시대, 자연의 기억보관소가 들려주는 전시실 너머의 이야기
잭 애슈비 지음, 제효영 옮김 / 김영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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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자연사 박물관이 세계을 구하는 법>
주말 나들이나 여행 코스로 한 번쯤 방문해 보았을 자연사박물관. 그곳에 들어서면 맨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 중앙 홀을 차지한 거대한 공룡 골격 표본이나 맹수들의 실감 나는 박제가 아닐까? 우리는 흔히 박물관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객관적인 공간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현직 동물학 박물관 큐레이터인 잭 애슈비가 쓴 《자연사박물관이 세계를 구하는 법》은 이러한 우리의 환상을 깨고, 유리 진열장 너머의 숨겨진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1. 우리가 보는 자연은 만들어진 자연이다
책의 1부에서는 박물관의 전시물이 사실 인간의 욕망과 편견, 사회적 통념에 의해 철저히 기획되고 조작된 인공물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드러낸다.
생생하게 박제된 동물은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특수 처리한 뒤, 인간이 만든 인공 뼈대 위에 덧씌운 조형물일 뿐이다. 관람객이 열광하는 거대한 공룡 뼈 또한 완벽한 한 마리의 뼈가 아니라 여러 마리의 뼈를 섞어 만든 복제품인 경우가 흔하다. 더 나아가, 과거 사냥꾼들의 과시욕 덕분에 박물관의 표본은 화려한 수컷이 압도적으로 많고, 동물의 성행동 중 동성 간의 행동은 부적절하다는 인간의 잣대로 오랫동안 검열당해 왔다. 지구 생물다양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곤충과 식물은 덩치 큰 포유류와 공룡에 밀려 변두리에 방치되거나 디오라마의 배경 소품으로 전락해 버린 현실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2. 수집의 어두운 그늘, 사라진 이야기
2부에서는 박물관을 채우고 있는 방대한 소장품들의 출처를 추적한다. 17세기에서 20세기 사이의 과학적 탐사는 순수한 학문적 목적이라기보다 제국주의에 기반한 식민지 자원의 착취 과정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수많은 동물과 광물, 심지어 사람까지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를 자연을 깊이 이해하게 해준 귀중한 발견들은 부유한 백인 남성의 독창적인 업적으로만 찬미되어 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여성과 유색인종, 그리고 기록조차 남지 않은 부족민들의 전문 지식과 희생이 있었음을 강조하며, 박물관이 그동안 무시해 온 모든 이야기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3. 두 큐레이터의 엇갈린 시선: 낭만의 수장고 vs 고발의 수장고
자연사박물관의 뒷모습을 생생하게 다룬 리처드 포티의 《런던 자연사 박물관》과 비교하면 애슈비의 시각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알 수 있다. 포티는 박물관을 평생 바친 무대이자 헌신적인 학자들이 담긴 낭만적이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는 박물관을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이 숨 쉬는 경이로운 지식의 성전으로 묘사한다.
반면 애슈비는 그 낭만적인 성전의 밑바닥을 가차 없이 드러낸다. 포티가 현미경 너머의 표본과 열정적인 학자들에게 찬사를 보냈다면, 애슈비는 그 표본이 어떻게 수장고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누구의 지식이 지워지고 착취되었는지를 날카롭게 묻는다. 박물관을 순수한 과학의 전당으로 회상하는 것을 넘어, 제국주의와 차별의 역사를 반성하고 큐레이팅 권력을 해체하려 한다는 점에서 두 책은 완벽한 대조를 이루며 훌륭한 보완을 이룬다.
4. 자연사박물관이 진정으로 세계를 구하는 법
과거의 조작과 편향성을 고발하는 데 그쳤다면 이 책은 그저 비판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박물관의 진짜 무대인 수장고로 시선을 돌려, 자연사박물관이 어떻게 현재와 미래의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전시되지 않은 수십억 점의 표본들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니다. 표본 하나하나에는 특정 생물이 언제, 어디서 살았는지에 대한 시공간의 기록이 담겨 있으며, 이는 기후위기, 생물다양성 감소, 감염병 등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수적인 근거 데이터가 된다. 과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과거의 표본은 멸종을 되돌리거나 질병의 단서를 찾는 거대한 타임캡슐이자 생물학적 기억 장치로 기능하게 된다.
마무리하며: 한국의 척박한 현실을 돌아보다
어느 나라를 방문하든 박물관을 반드시 찾는다. 장구한 시간 속에서 역사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특히 자연사박물관이 있다면 언제나 1순위 필수 코스가 된다.
세계 여러 나라의 자연사박물관 중에서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도심 한복판에 있는 라 브레아 타르 핏츠와 몽골 자연사박물관은 지각의 변동과 생명 진화의 장대한 서사를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잊지 못할 장소다. 라 브레아는 화려한 도시 한가운데서 천연 아스팔트가 지금도 끓어오르는 활성 발굴지라는 점에서 경이롭다. 수만 년 전 타르에 갇힌 검치호와 매머드부터 미세한 꽃가루까지 빙하기 생태계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기후 변화 속에서 생명이 겪어온 궤적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묵직한 감동을 준다.
또한 몽골 자연사박물관은 척박한 고비 사막이 수천만 년 동안 품어온 백악기의 시간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갑작스러운 모래폭풍에 덮여 죽음을 맞이한 순간이 관절 하나까지 온전히 보존된 공룡 화석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판구조론적 지각 변동과 거대한 지리적 환경이 생태계에 미친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어 깊은 전율을 안겨주었다.
인류 미래를 위한 최전선의 연구 인프라로 기능하는 해외의 훌륭한 자연사박물관들을 떠올리면, 한국의 현실은 씁쓸하기만 하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처럼 지자체에서 운영하거나 일부 대학에서 수집하여 운영하는 곳이 전부일 뿐, 국가를 대표하는 국립자연사박물관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구체적인 건립 계획도 요원하다. 이는 한국의 경제 규모와 문화적 위상을 고려할 때 부끄러운 일이다.
《자연사박물관이 세계를 구하는 법》은 박물관이 단순한 구경거리가 있는 장소가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는 최전선의 공간으로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훗날 한국에도 한반도의 장대한 지질학적 역사와 생태계의 흐름을 담아낼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다시 박물관을 방문한다면, 유리 진열장 너머의 생물들이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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