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아침 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해서 긴 팔을 꺼내 입었습니다. 한낮은 조금 덥네요. 그래도 공기의 촉감이 달라요. 두번 접어 올린 소매 사이로 들어오는 가을을 느껴 봅니다. 느끼지 않으면 금세 지나가 버릴 테니까요.

“인간은 가을의 무화과다.”
며칠 전 출근길에 대뜸 떠오른 문장. 산문집 <아침의 피아노>에서 본 니체의 말, 이라는 것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이 다음에 어떤 글이 이어졌더라(긁적긁적).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꺼내 다시 읽어 보는데, 이 책이야말로 가을의 무화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철학자 김진영 선생님이 간암 말기 선고를 받고 임종 직전까지 휴대폰 메모장에 쓴 일기 200여 편을 담고 있어요. 스스로의 글에 엄격해 번역서 1권 외에는 아무것도 출간하지 않았다는 작가의 첫 산문집이자 유고집입니다.

시한부의 일기라지만, 문장은 간결하고 감정은 담백합니다. 그 안에 담긴 사색은 아침 출근길에 고개 들어 바라보는 가을 하늘처럼 맑고 깊습니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일상의 풍경 속에 곁들인 아름답고 밀도 높은 생의 기록. 마음에 스며드는 문장을 좇아 적다 보면 거의 모든 페이지를 적게 되는 책. 다시 읽어도 너무 좋고, 이 계절에 더 읽기 좋습니다.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중에서
p. 13
분노와 절망은 거꾸로 잡은 칼이다.
그것은 나를 상처낼 뿐이다.

p. 67
내가 상상하지 않았던 삶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것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

p. 81
긴 아침 산책.
한 철을 살면서도 풀들은 이토록 성실하고 완벽하게 삶을 산다.

p. 97
아침 산책. 또 꽃들을 들여다본다. 꽃들이 시들 때를 근심한다면 이토록 철없이 만개할 수 있을까.

p. 112 중에서
문득 자라투스트라의 한 문장: "인간은 가을의 무화과다. 인간은 무르익어 죽는다. 온 세상이 가을이고 하늘은 맑으며 오후의 시간이다." 무르익는다는 것은 소멸하고 소멸하는 것은 모두가 무르익었다. 니체는 그 순간을 '조용한 시간(Der Stille Stunde)'이라고 불렀다. 조용한 시간-그건 또한 거대한 고독의 순간이다. 사람은 이 난숙한 무화과의 순간에 도착하기 위해서 평생을 사는가.

p. 182
“얼마나 걸어가야 절이 나오나요?”
라고 물으면 촌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자뿌리고 그냥 가소. 그라믄 나오니께…”

p. 196
생은 불 꺼진 적 없는 아궁이. 나는 그 위에 걸린 무쇠솥이다. 그 솥 안에서는 무엇이 그토록 끓고 있었을까. 또 지금은 무엇이 끓고 있을까.

p. 216
늙은 제주 해녀들. 리포터가 묻는다. “물에 올라오면 그렇게 허리가 아픈데 어떻게 바다 일을 하시나요?” 늙은 해녀가 말한다. “물질을 사람 힘으로 하는가. 물 힘으로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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