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귀뚜라미 소리를 서글프다거나 애절하다고 하지,
천진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울고 있는 귀뚜라미를 가만히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운다는 것도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실어 그렇게 표현할 뿐, 귀뚜라미는 그저 앞날개를 열심히 비비며 소리를 낼뿐이다. 밤새도록 계속되는 그 움직임은 무척이나 진지해 고지식해보이기까지 한다. 너무나 진지해서 천진하고, 천진하기에 맑아, 우리몸에서 가장 맑고 가느다란 감정의 핏줄과 쉽게 섞이는 것이 아닐까.
두보의 시를 읽으며 나는, 내 핏줄이 떨리는 듯한 귀뚜라미 소리를새롭게 듣는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덩달아 나도 천진해지고 맑아지는 기분이다.
책 속에는 또 사람의 목소리가 있다.
세상살이와 사람살이에 대한 깨우침을 주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있고, 그늘진 신세를 한탄하는 울적한 목소리도 있다. - P51

책을 대할 때마다 이렇게 눈과 귀, 코, 입 등 내 몸의 모든 감각은깨어나 살아 움직인다. 자신과 연결된 신경과 핏줄을 건드리고, 피가도는 그 흐름은 심장까지 전해져 마침내 두근두근 뛰게 한다. 감격에 겨운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온 우주가 다시 깨어 일어나기도 한다.
그 무렵, 나는 책과 지내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을 모아 문집을 만들었다. 《이목구심서(耳目)> 제목을 붙였는데, 글자 그대로,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적어 놓았다는 뜻이다.
- P55

내가 윤회매 만들기를 좋아한 까닭은, 살아 있는꽃 못지않은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손가락끝에 온 신경을 모으고 매달릴 수 있는 그 일이 좋아서였다. 나는 윤회매를 만드는 손끝에 나 자신을모두 실었다. 가난한 살림도 잊고, 어찌될지 모르는 내 앞날도 잊고, 꽃잎을 만들고 있는 내 존재마저 잊었다. 오직 내 손에서 피어날 맑고 투명한 꽃잎만 생각했다 - P58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함께 흥분하여 소리 높여 잘잘못을 따지거나, 우스갯소리로 울적한 마음을 한번 비틀어 밖으로 날려 보내는 것. 유득공은 주로두 번째 방식을 썼다. 그의 성격이 워낙 안 되는 일에 연연해 하기보다는 털어 버리기를 좋아해서도그렇고, 도무지 웃음기라고는 없는 우리의 얼굴이잠시나마 피어나는 것을 보고 싶어서도 그랬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박제가는이런 이야기를 했다.
"유득공의 마음속에는 우물 하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근심 걱정도 한 번 담갔다 하면 사뿐하게 걸러져 밝은 웃음으로 올라오게 하는 우물 말입니다." - P85

그 순간 우리들의 가슴에는 큰 물결이 일렁였다. 박제가의 짙은 눈썹은 더욱 꿈틀거렸다. 하늘, 땅, 지구의 일은 워낙 실감이 안나어리둥절해지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가 중심이 될 수있다는 말은 새롭게 다가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그리고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이 소중한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는 뿌듯한 느낌이었다.
밤이 꽤 깊어서야 우리는 선생 댁을 나섰다. 집에 돌아오니, 방 한구석에 아이가 갖고 놀던 둥그런 실 뭉치가 보였다. 끊어진 실을 이어 놓았는지 묶어 놓은 매듭이 도드라진 것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끌어당겨 가만히 굴려 보았다. 매듭이 보이는 쪽은 앞으로 갔다가 다시 뒤로 돌아간다. 왼쪽에 있는가 하면 어느새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중심에 있는가 하면 다시 한쪽으로 물러난다. 이리저리 실 뭉치를 굴리며 생각하니, 과연 어디가 중심이랄 수도, 어디가 변두리랄 수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동쪽의 작은 나라라고 스스로를 낮추며 살아왔다. 세상의 으뜸이며 가운데는 오직 중국(國)뿐이었다. 나라 이름을그렇게 지은 것처럼, 중국 역시 자신들만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왔다 - P58

그러나 저실 뭉치 위의 매듭을 중국이라 생각하면, 그 자리가 언제나 가운데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공처럼 둥근 지구에서는 어느 나라도 자신이 으뜸이며 가운데라 우길 수가 없다. 선생의 말씀처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어떠한 나라든지 가운데가 될수 있고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의 처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신분의굴레가 있는 현실 속에서 나와 같은 서자들은 변두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일생을 놓고 보면 누가 중심이고 누가 변두리라고 할 수있겠는가.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는 스스로가 중심인 것이다. - P159

바위 위에 둥지를 튼 제비처럼, 현실에 뿌리를 든든히 딛고 선선생의 몸집은 거대했다. 연암 선생이 품은 이상은 제비처럼 날렵하고아름다웠다. 새로운 것에 대한, 새롭게 다가오는 시대에 대한 선생의말씀 역시 제비의 날갯짓만큼이나 단호하고 확실했다. 선생을 통해나와 벗들은 옛날이 아닌 지금, 중국이 아닌 조선의 현실을 바라볼수 있었다. 신분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가질 수 있었다.
제비와 바위, 연암이란 이름으로 선생은, 새로운 물결이 봄 아지랑이처럼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며 헤쳐 오셨다. 그물결 어딘가에 나와 벗들의 지난날도 함께했을 것이다. - P174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느끼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사물을 받아들인다.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싶은 것, 인정하고 싶은 것을미리 정해 두고, 그 밖의 것은 물리치고 거부한다. 그러한 마음에 기초가 되는 것은 역시 지난날에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들은 자신만의 감각이나 경험이다. 이것이 바로 선입견(先入見)이다.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음식은 손이나 기껏해야 입으로 집는 것이며, 아래로 드리워진 것은 모두 다리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동물인로끼리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비좁은 틀에 거대한 코끼리를 구겨 넣으려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 P176

 코끼리를 다리가다섯 개인 하마라든가, 주둥이가 새의 부리처럼 별나게 긴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비단 코끼리에 대한 것뿐이겠는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난날의 선입견에 갇혀 있으면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게 된다.
세상은 늘 이대로 계속되어야 하고, 학문도 옛사람의 문장을 그대로 외우는 것이 제일이라 여기게 된다. 글도 옛사람의 것을 본떠 지어야만 제대로 된글이라는 대접을 받는다. 사람과 사귈 때도 신분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을 먼저 보게 되니, 참다운 벗을 만나 마음을 나누기도 어렵다.
선입견은 결국, 자신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람과 사물의 본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는 편견이기도 하다.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힌 세상은 새로운 활기라고는 없는 세상, 변화를 거부하는 낡은 것들로 E만 가득한 세상일 것이다.
선입견을 버리라는 선생의 말씀에 나와 벗들이벅찬 마음으로 따른 것은 당연했다. 우리들이야말 - P177

그러나 연암 선생의 이야기는 진심이었다. 중국 사람들이 깨어진기와 조각 한 장이라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담을 쌓는 데 쓰고, 더 작은 조각들은 땅에 깔아 비가 와도 질척이지 않게 하는 것을 주의 깊게 보신 것이다. 그저 낯선 곳의 풍물을 구경 삼아 간 것이라면, 결코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광경이다. 조선 백성들에게 이로운 것은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기에,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모습일 것이다.
그뿐인가. 그들은 냄새나는 똥오줌조차도 알뜰하게 모아 두었다.
그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 아무렇게나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보기좋게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네모반듯하게, 혹은 여섯 모나 여덟 모가 나게 맵시 있게 쌓아 올린 똥거름 더미는 볼 만한 구경거리였다.
언뜻 보면 똥 무더기 같지도 않았다. 더럽고 하찮은 것이지만 밭에거름으로 쓰일 때는 금싸라기같이 소중하기에, 그렇게 알뜰히 모으고 대접하는 것이었다. 형식이나 체면보다는 생활에서 이롭게 쓰일수 있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정신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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