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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합치 - 예술과 실존의 근원
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이근세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월
평점 :
실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모든 사물이나 동물,
식물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는 것들은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인 우리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어떤 형태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에서 벗어나 변화를
일으키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사고의 틀을 확장한다면 정체된 존재가 아닌
창조의 연속성 상태가 된다.
즉, 존재에서 실존의 형태로 유지되는 것이다.
변화를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 사회, 가정의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외부에서 규정된 질서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안정을 유지하고 고난과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동물들이 무리를 지어 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질서에 균열을 낸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소유욕이 그 바탕에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소유욕은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하기 위한 기술의 발전을 꽤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의 사상과 신체에 대한 인정도 포함된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만델라의 인권
운동, 간디의 독립운동 등이 그렇다.
탈합치는
피카소의 그림처럼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형태의 그림을 창조하고,
균형 잡힌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실존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진화론과 기술의 발전 또한 탈합치로 보았는데,
탈합치는 내적 만족에서 벗어나 외부로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
같다. 책 내용의 난이도가 상당한데,
예술과 철학의 기존 틀을 벗아나 있기 때문이리라.

탈합치의
저자 '프랑수아 줄리앙'은 확립과 동시에 고정되는 모든 질서를 내부에서 해체하며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자원을 나타나게 하는 탈-봉인을 탈-합치로 정의하였다.
어긋남이란 사물들의 정합적인 결합, 요컨대 경첩으로부터 빠져나옴이다. 이런 문구들은 바로잡아야 할 시간의 퇴화가 아니라 미래의 생산력이며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것을 열어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과 실존은 그 맥락을 같이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저자 프랑수아 줄리앙은
철학자로 파리대학 교수이며 중국과 서양 철학을 연구하며 탈합치라는 독창적인 문화론과 실존의 윤리학을 정립하고 있다. 줄리앙의
작품은 강력한 생각의 단합과 명확한 진보가 있다.
철학의 길의 맨 끝에서 줄리앙은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갖는 일반적인 질문을 던진다. "보편적이 존재합니까? 우리는 공통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단합과 차이 적합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탈합치한다는 사실, 즉 안착된 합치를 계속 해체한다는 사실로부터 삶의 현상 자체, 달리 말해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한에서의 삶의 현상 자체가 비롯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쇄신으로서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산다는 것은 영속을 위해 이전 상태를 연장하고 지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전 상태가 계속 지속될 경우 삶은 굳어지고 해체되어 죽음을 향하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오히려 이전 상태를 벗어나는 일이고 밀착 상태의 결속을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깨는 일이며, 이는 그로부터 새로운 것이 계속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산다는 것은 현재라고 칭해지는 상태에 이른, 따라서 그 상태의 고갈에 이른 적합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삶을 다시 가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계속해서 살기 위해 이전 상태에서 단절 없이 탈합치 하는 것이다.
단지
삶을 장식하기 위한 삶의 교훈이 아니며,
단지 자신의 삶을 조각할 것이기 때문도 아니다. 자신의 삶을 원하는 만큼 미적으로 만드는 것,
즉 삶의 예술은 유감스러운 개념이다. 이와 반대로 예술에 고유하며 근대성이 근원적으로 밝혀주는 탈함치의 요청은 실존에 고유한 능력을 감각의 차원에 기입함으로써 이
능력을 즉각 작동시킨다.
예술과 실존은 새로운 것, 곧 전대미문의 것이 실질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현재의 삶에 매몰되어 탈출구를 못 찾아 체념하거나, 그런 상태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다. 영유아 학대, 고통스러운 삶에 저항할 수 없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자아 매몰은 고정된 현실의 테두리 안에서 외부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자신에 대한 지나친 관대함과
타인에 대한 지나친 경계심에서 발현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현실이라는 벽을 깨고 외부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생각보다는 실천이 필요한 것 같다.
피카소가 난해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고정관념의 벽을 깨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https://blog.naver.com/eomsuheung/222241044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