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겨울
아들린 디외도네 지음, 박경리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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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겨울, 책 제목을 보고 책의 분위기와 내용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청록의 푸르름으로 가득 찬 여름, 풋풋하고 싱그러움을 매력으로 소녀의 성장을 그린 이야기인가? 무더웠던 여름이 가슴 시리게 추운 겨울로 느껴질 만한 성장통이 아닐까? 하며, 책을 집어 들었고, 첫 줄을 읽자마자 쿵- 하고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시체들의 방이라니? 스릴러인가? 하는 생각은 자연스레 몸을 웅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불쑥 불쑥 그 느낌이 튀어나왔다.

 

이야기엔 원래 우리가 무서워하는 걸 몽땅 집어넣기 마련이야. 그래야 그런 일들이 진짜 삶에선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실할 수 있거든. / 014

 

어린이들, 알다시피 가까이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어. 너희도 알게 될 거야. 너희 하늘을 어두워지게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란다. 너희 기쁨을 빼앗아가고, 너희 어깨 위에 앉아 너희가 날아오르지 못하게 하지. 그런 사람들을 멀리해. / 023

 

우리 집에서 가족 식사란, 커다란 잔에 담긴 오줌을 매일 마셔야만 하는 벌과 비슷했다. / 026

 

10살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집은 처음부터 행복의 공간은 아니었다. 폭력적인 아빠와 그 공포에 잠식 당해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 않고 모든 것을 놓아버린 엄마는 그저 자신의 자리만 근근이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부모의 존재가 외면과 위협이 되는 상황 속에서 10살의 소녀에게는 6살 사랑스러운 남동생 질이 유일한 삶의 이유였고, 행복이었다. 가장 순수한 사랑의 대상이며, 자신이 받지 못했던 사랑을 동생에게 쏟으며 자신도 치유받고 있었다. 동생의 웃음이면 세상 모든 상처가 치유된다는 소녀. 그 웃음과 미소를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어린 소녀의 일상에 균열이 생겼다.

 

마치 농담 같았다. 웃음소리까지 들려왔다. 진짜 웃음은 아니었다. 내가 웃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것이 죽음이었다고 믿는다. 아니면 운명이었거나. 그도 아니면 나보다 훨씬 거대한 어떤 것, 그날따라 짓궂게 굴고 싶었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었다고. 그 힘이 노인의 얼굴을 한 채 웃기로 결심했던 것이라고. / 031-032

숨을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숨을 수 없다면, 다른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피와 공포 말고는 아무것도. / 033

 

공허하다거나 하는 기분은 어미니를 전혀 괴롭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랑 없는 삶 또한 마찬가지였다. / 043

 

무늬뿐인 부모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남매는 나름의 행복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말이다. 읽는 내내 먹먹함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때로는 부모라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부모의 역할은 사라지고 아빠란 권위로 숨 막히는 폭력을 휘두르며, 그 공포에 몸을 납작 엎드린 엄마와 아이들. 그 상황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했고, 분노마저 일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린 두 남매가 목격한 끔찍한 사고 앞에서도 그 아이들에게 손 내밀어 줄 부모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입을 닫고, 아이들을 방치한 어른만이 존재했다. 간절했던 자신을 지켜줄 어른의 부재로부터 소녀는 어린 동생의 그 순수했던 미소를 되찾고 싶었고 자신의 하나뿐인 행복을 지키고 싶어 계획을 세우게 된다. 바로, 타임머신을 만드는 것. 그 계기로 과학에 소질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지만, 타임머신을 만들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 사실은 동생의 미소를 되돌릴 수 없음을 의미했다.


끝까지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10살이었던 아이는 15살 소녀가 되었다. 불행했다면 불행하고, 불안전했던 일상에서 소녀는 자신의 삶을 조금씩 찾아 나섰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비록 동생의 미소를 되돌리진 못했지만, 무너지진 않았다. 필요할 순간에 손을 잡아준 부모는 없었지만, 나쁜 어른만 존재한 건 아니었다. 친구가 되어준 모니카, 배움의 갈증을 채워준 영 교수, 어린아이가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른의 존재 유무가 삶에 있어 얼마나 큰 변화가 되는지, 괜찮은 어른의 부제로 인해 인생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어린아이에서 15살 소녀의 정신적, 육체적 변화와 자신의 자아에 대한 지독하게 겪는 사춘기의 성장통이 그저 안쓰럽기도 하고, 삶의 끈을 악착같이 붙들고 있는 소녀의 제2막 인생을 응원해본다.

 

나는 자연과 그것의 온전한 무심함을 사랑했다. 우리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자연은 자기만의 방식대로 생존과 번식에 관한 세밀한 계획을 수행했다. 아버지가 어미니를 망가뜨려도, 새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는 거기에 위안을 느꼈다. 새들은 지저귀고 나무들은 삐걱거렸으며 바람은 밤나무 잎 사이를 오가며 쉼 없이 노래를 불렀다. 그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관람객이었다. 그리고 작품은 멈추지 않고 공연되었다. / 118

얼음 같은 손으로 내 무릎을 쓰다듬으며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돈을 벌어서 떠나." 어머니가 나에게 충고를 한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충고라는 걸 한 것도 아마 어머니 인생에서 처음이었을 것이다. "엄마, 엄마는 왜 인생을 놓아 버렸어요?" / 223

이제 끝났다. 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포식자도 아니었다. 나는 나였고, 파괴될 수 없었다. / 211

여름은 그런 혼란스러운 감각, 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존재에게서 비롯한 경탄과 내가 '아빠'라고 부르는 존재가 불러일으킨 어마어마한 공포 사이에서 끝이 났다. 다음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면 내 삶이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완전히 새롭게. / 235

나는 내 몸을 사랑했다. 나르시시즘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설령 내 몸이 못생겼다 하더라도 다름없이 사랑했을 것이다. 내 몸은 절대 배신하지 않을, 함께 길을 걷는 동반자였다. 그리고 내가 보호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 238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한 주관적인 감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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