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손님
히라이데 다카시 지음, 양윤옥 옮김 / 박하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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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다르지 않았던 오늘이 특별함을 부여받는 건 대부분 거창한 이유보다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기분 좋은 사소함의 시작은 서서히 스며들 수도 있고 운명처럼 다가올 수도 있다. 그리고 특별함을 부여하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이 그 시작이며 스치듯 지나갔던 사소함을 운명이라 정의하는 것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무언가를 놓쳤을 때, 물 흐르듯 보내주는 것도 상실감에 눈물짓는 것도 모두 나의 생각과 선택에서 비롯된다.

겨울로 접어들었다. 서서히 치비는 살짝 열어둔 창문 틈새로, 마치 작은 물길이 거듭거듭 완만한 비탈을 적시고 뻗어나가듯이 우리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때 일종의 운명이라고 할 것까지 그 물길에 함께 따라와 있었다. / 23

운명에 대해 고찰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운명이란 인생의 반 이상을 지배하는 것이며 그 나머지는 거기에 대항하려는 인간의 역량(비르투)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운명이라는 것을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여신, 혹은 언제 범람할지 모르는 강과도 같다고 상상했다. / 28

시인이자 소설가인 히라이데 다카시 작가는 '시 안에서 새로운 산문을 만들어 내는 시인'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그의 책을 읽어보니 그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리고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중국어 등 20여 개 언어로 번역된 <고양이 손님>은 <어린 왕자>, <동물농장>, <갈매기의 꿈>, <연어>와 함께 '최고의 현대 우화 5편'에 선정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번역 출판될 당시에는 <하늘에서 온 고양이>라는 제목이 붙었다고 한다. 그 제목도 치비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나 고양이 손님이 더 잘 어울리는 치비 같다.

그런데, 총 29장의 챕터로 나눠지는 고양이 손님은 소설이나 우화보다는 에세이 느낌이 더 잘 어울렸다. 하루하루 일상을 세밀하게 기록한 읽기를 읽는 기분도 들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주변을 섬세하게 묘한 부분이나, 두 부분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지인들의 이야기들 소소하게 벌어지는 일상의 조각들을 잘 정리해놓은 기록처럼 보였다. 그리고 시인이 쓰는 글은 이렇게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문장들로 가득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도 들게 했다. 어느 하나 허투루 쓰인 문장이 없는 것처럼 섬세하고 감각적이다. 읽는 내내 천천히 꼭꼭 씹어 치비와의 일을 마음에 담았다.

고결한 인간은 타인을 밀쳐내면서까지 치고 올라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게다가 당시 시대라는 격류는 앞으로 점점 더 고결한 자부터 먼저 쳐내는 방식으로 그 흐름이 빨라질 것 같다고 전망되었다. / 41

​복도에서 의사에게 앞으로 보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 서서히 살해되어간다는 것을 잊지 마라.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엇에,라는 것까지 명확히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 42

30대란 그야말로 무참한 나이라고,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다. 재난을 면하느냐 마느냐는 경계가 된 파도를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마구 뛰어놀았던 시간이라고,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다. / 43

부부의 일상에 무심한 듯 침범해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고, 흔적들을 남기지만 우는 일도, 부부의 손길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확실히 주인과 주인 아닌 부부에게 선을 긋는 치비. 하지만 그런 치비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전용 문, 전용 방까지 만들어주며 마음껏 놀다가 갈 수 있게 해준다. 어느새 부부에게 치비를 잠깐 왔다 가는 손님에서 친구로 가족으로 점차 스며들고 있었다. 치비는 그렇게 양쪽 집을 마음껏 넘나들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이별의 슬픔은 그들이 얼마나 치비를 마음으로 아꼈는지 보여준다. 다른 어떤 부분보다 귀여운 고양이가 저절로 연상되는 치비의 등장 신들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나에게도 귀여운 고양이 손님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 치비와의 이별, 정든 집과의 이별, 주인집 할머니와 할아버지와의 이별,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이별을 통해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이 들었다.

저 느티나무 아래 하나의 시간이 존재한다. 저 느티나무 그늘에서 자라는 작은 소나무 밑동에 소중한 구슬 같은 것이 잠들어 있다. 창문에서 그런 먼 풍경이 보인다면 느린 망각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어떻게든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 120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한 주관적인 감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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