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근미래의 풍경
장강명 지음 / 해냄 / 2026년 10월
평점 :
-
<근미래의 풍경> 장강명, 해냄
🪟
AI를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새로운 AI 서비스가 출시되면 일단 무조건 써보는 편이다. 퇴근 후에도 이것저것 붙잡고 씨름하다 보면, 분명 일을 덜 하려고 켰는데 어느새 내가 기계를 정성껏 돌보고 있다는 묘한 피로감이 들 때가 있다. 장강명 작가의 『근미래의 풍경』을 읽는 내내 그런 순간들이 자주 떠올랐다. 책 속에 등장하는 거대 플랫폼 기업 ‘네카팡’이 내놓는 서비스들은 얼핏 황당해 보이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지금 판교 어디선가 누군가 열심히 만들고 있을 것만 같은 것들이기도 했다. '네카팡'이란 이름이 뭔가 센스 있게 느껴져서 피식 웃기도 했지만, 책을 읽다 보니 조금은 등꼴이 오싹해지는 기분도 느낄 수 있었다.
🧬
스물네 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일종의 기업의 카탈로그나 짧은 뉴스, 혹은 온라인 상담 글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내가 쓰는 앱에 특이한 기능이 딱 하나 더 업데이트 되는 작은 변화가 생겼는데 그 효과는 뭔가 큰 변화를 야기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이 책은 아주 잘 다루고 있다. 특히 반지하 방에 가상 유리창을 달아 근사한 바깥 풍경을 띄워주는 에피소드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주거 문제를 그저 창밖 풍경만 바꿔 해결했다고 믿고 사실상은 그냥 안 보이게 치워버리는 발상이라니...!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느끼면서도 소름이 돋는 이야기란 생각을 했다.
🪟
부부가 집안일이나 육아를 얼마나 했는지 점수로 매겨서 공평하게 정산해 주는 AI 이야기도 무척 재밌었다. 부부 중 누구 하나 억울한 사람 없이 딱 떨어지게 나누는 게 공평하고 공정해보이기는 하다만, 막상 모든 행동을 점수로 환산되어버리는 관계는 얼마나 숨 막힐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좋아서 선뜻 해준 일이나 굳이 생색내지 않고 넘긴 배려까지 전부 계산되는 세계라니...! 반반 결혼, 엑셀 결혼이라는 말이 한 때 유행했었는데, 결혼 후에도 모든 것들이 수치화되고 관리된다면 그건 소지옥에서 사는 거나 다름이 없지 않을까? 내가 데이터를 다루는 사람이다보니, 숫자가 주는 편리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는 있다. 하지만 동시에 결코 수치화할 수 없는 마음의 영역이 있다는 것도 안다. 모든 걸 계산해서 해결하려는 기술이 사람 사이를 어떻게 메마르게 만드는지 꽤 얄밉도록 정확하게 꼬집은 대목이 아닌가 싶다.
🪫
관객의 취향에 맞춰 AI가 영화의 장면이나 결말을 실시간으로 바꿔 보여주는 서비스도 아주 인상깊었다. 같은 제목의 영화를 봤는데, 누구는 슬픈 결말을 보고 누구는 통쾌한 복수극을 보는 세상이라... 내 입맛에 딱 맞춘 콘텐츠라는 게 보기에는 좋아보이기도 하는데, 같은 경험을 함께 나눈다는 측면에서 공동체 의식이나 사람 사이의 대화의 즐거움 자체를 사라져 버리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미 알고리즘이 골라준 화면에 갇혀 저마다 다른 세상을 보고 사는 요즘이라 이 상상이 점차 실현되어가고 있는 느낌도 든다. 아마도 나는 내일도 새로운 AI 서비스가 나온다면 열심히 찾아 써볼 것이다. 다만 이제는 ‘이걸로 무엇을 더 빠르게 할 수 있을까’만 묻기보다, ‘그 편리함의 대가로 무엇이 사라질까’도 함께 고민해 봐야 겠다. 미래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과학기술이 가져올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을 해보기 위해서라도 정말 꼭 읽으면 좋을 책이란 생각을 했다.
* 이 책은 해냄출판사(@hainaim)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근미래의풍경 #장강명 #해냄출판사 #STS_SF #서평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