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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밑 도피자들
리러하 지음 / 팩토리나인 / 202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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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밑 도피자들> 리러하, 팩토리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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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감당하기 힘든 시련과 역경을 맞닥뜨릴 때마다 간절했던 것은 상황을 단번에 뒤집어줄 기적보다는, 그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잠시 숨을 고르고,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아주 짧은 시간과 작은 틈이었던 것 같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옷자락이 완전히 젖지 않도록 몇 걸음 물러서서 올려다볼 수 있는 처마 같은 공간말이다. 이 책 『처마 밑 도피자들』은 저승과 이승의 경계라는 기묘한 판타지적 세계관을 빌려왔지만, 장르가주는 재미를 넘어 상실과 고통 앞에 선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온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묵직한 물음을 던지는 꽤나 철학적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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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너무 자주 슬픔이나 문제를 주로 빠르게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곤 한다. 세상은 아파할 시간조차 넉넉히 허락하지 않고 다음 일과를 향해 등을 떠밀기 일쑤다. 하지만 소설이 보여주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저승사자의 발걸음을 영원히 막아 설 수는 없겠지만, 그저 못다 한 인사를 건네고 마음에 걸린 매듭을 풀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짧은 시간을 벌어주는 행위를 통해 망자들을 위로한다. 그 소박한 유예가 유독 뭉클하게 다가와 내 마음도 위로를 받는 경험을 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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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죽음 그 자체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산 자의 집착에 대한 주제가 마음에 많이 남았다. 떠나야 할 존재에게 존엄한 마침표를 찍을 시간을 주는 배려와, 떠나보낼 용기가 없어 상대를 억지로 붙잡아두는 집착은 겉보기에 닮아 있어도 그 속내는 정반대일 수밖에 없다. 사랑하기 때문에 놓아주지 못한다는 말은 때로 얼마나 기만적인지... 상대의 고통이나 존엄보다 내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붙들고 늘어지는 미련은, 아무리 선의로 포장해도 결국 타인을 가두는 차가운 감옥이 될 뿐이다. 누구를 위한 배려인지 제대로 묻지 않는 다정함은 언제든 폭력으로 뒤집힐 수 있다. 타인을 위한다는 핑계 뒤에 숨겨진 내 이기적인 결핍은 없는지, 관계 속에서 내가 지어 올린 안식처가 혹여 상대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아니었는지를 스스로에게 되묻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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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환상적인 설정을 다루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 속에는 그런 마법 같은 잠시동안의 틈과 여유는 생각보다 잘 주어지지 않는 것 같다. 저승사자의 눈을 가릴 솟대도 없고, 멈추지 않는 시간을 대신 늦춰줄 친절한 결계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살아 숨 쉬는 지금뿐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 무겁고 절실하게 다가온다. 더불어 누군가의 아픔을 대할 때의 태도 역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슬픔 앞에서 무엇이라도 해줘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곤 한다. 하지만 처마는 비를 완전히 멈추게 하는 지붕이 아니다. 비가 조금 잦아들 때까지, 스스로 다시 걸어갈 힘을 얻을 때까지 잠시 어깨를 기댈 그늘 한 뼘을 내어줄 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의 곁을 지킨다는 것, 그 다정함의 알맞은 크기는 어쩌면 작은 자리 내어줌이면 충분할 것이다.
* 이 책은 쌤앤파커스(@samnparkers)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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