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존재의 대연쇄
단요 지음 / 사계절 / 2026년 6월
평점 :
-
<존재의 대연쇄> 단요, 사계절
☎️
단요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늘 묘한 혼란에 빠지곤 한다. 지금 내가 잘 짜인 서사를 읽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한 작가의 머릿속에서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정교하게 돌아가는 거대한 지적 사고실험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스케일도 거대하고 이야기의 복잡성도 엄청나다. 단요 작가의 소설집 『존재의 대연쇄』는 그 과감한 실험이 꽤나 멀리까지 뻗어나간 결과물이 아닌가 한다. 로마사와 고대 신화에서 출발해 생물의 감각과 진화, 인공지능, 그리고 신학과 컴퓨터공학의 영역까지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책이라니... 수록된 여섯 편의 이야기는 소재와 질감이 저마다 판이하지만, 결국 다음과 질문으로 수렴되는 것 같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되게 하며, 신은 누구에게나 신일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구원은 정말로 우리를 구할 수 있는가?"
🦒
가장 매력적인 작품은 단연 「사랑하는 신의 생일」이었다. 오래된 유선전화기로 2천 년 전의 로마의 폭군 칼리굴라와 통화한다는 기발한 시간여행 설정이다. 심지어 그것을 통해 이 작품은 관계의 본질을 짚어내려 시도한다. 미래를 아는 현대인의 목소리가 고대의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인 신의 음성이 되고 반대로 폭군인 자신을 오롯이 믿어주는 한 존재를 통해 비로소 세계와 연결된다. 누군가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는 것으로 사랑을 정의하는 결말은, 거대한 역사와 구원의 담론 속에서도 결국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미치는 파동으로 돌아와 긴 여운을 남긴다. 사자와 기린의 우화로 낮과 밤, 계절의 기원을 빚어낸 「세상의 이름은 기린」 역시 오래된 신화의 숨결 속에 상실과 분노, 이해와 용서의 간극을 밀어 넣으며 독특한 서정성을 뿜어내는 작품이었다.
🫧
이 소설집 속 작품들은 인간이 품어온 환상을 과감하게 해체하기도 한다. 「어떤 구원도 충분하지 않다」에서는 고대의 마술사와 예언자를 온도를 시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던 돌연변이라는 과학적 가설로 재해석한다. 한때 기적이라 숭배받던 능력이 기술의 진보로 평범한 일상이 되었을 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허무에 불과하다. 기적의 메커니즘을 밝혀냈다고 해서 삶에 내재된 고통까지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인 것일지도... 「빛 속에」에서는 끝없는 수술을 견뎌야 하는 인간 아이와, 명령에 지쳐 스스로 소멸을 택하려는 인공지능을 나란히 배치한다. 목숨을 살려두고자 하는 선택이 언제나 선한 것인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고통을 대신 결정할 권리가 있는지를 묻는 이 작품은 기술의 미래보다 고통을 느끼는 존재를 대하는 윤리적 태도에 집중해 단단한 질문을 던진다.
🕹️
반면 표제작 「존재의 대연쇄」와 부록 성격의 「격자 공간 제어 지침서」는 독서의 즐거움과 지적 피로가 팽팽하게 맞서는 지점이다. 성경의 신학적 도그마를 프로그래밍 언어로 치환하고, 시뮬레이션 우주론과 자유의지, 종말론을 한데 엮어낸 작가의 야심만만한 서사와 구조는 정말 감탄스럽다. 인간이 만든 가상 세계 속 존재에게 인간이 신이라면, 인간 역시 상위 차원의 피조물일 수 있다는 발상 또한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중반 이후 이어지는 피에르와의 긴 신학적 논쟁과 프로그래밍 시스템 설명은 이야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보다, 독자가 방대한 설정을 학습하고 해독해야 하는 영역으로 넘어가며 서사의 탄력을 다소 떨어뜨리는 면도 있었다. 완벽한 가상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작가의 집념은 돋보이지만, 문학적 여운보다는 세밀한 설정 노트를 들여다봐야 하는 피로감을 짙게 남기기도 한다.
🧬
표제작이 서사보다 설정의 부피가 앞서며 독자에게 과도한 해석의 노동을 요구하기도 해서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좋았던 책이었다. 이 책이 한국 SF 지형에서 대단히 희귀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책을 덮고 나면 존재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결코 쉽게 풀리지 않는 성가시고도 매혹적인 질문이 머릿속을 오래도록 맴돈다. 그리고 지적인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독자에게 이 책은 바로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펼쳐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 이 책은 사계절출판사(@sakyejul)에서 제공받아 독서모임 진행을 했습니다.
at @yamongyamong_ss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chiwonna_bier @apureumdite @i_am_what_i_read
#존재의대연쇄 #단요 #사계절 #독서모임 #서평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