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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책
후안 비요로 지음, 보탬 옮김 / 열림원 / 202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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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책> 후안 비요로,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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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 한동안 머릿속이 상당히 어지러웠다(겨우겨우 다 읽었다). 도서관이 우주가 되고, 책 한 권이 세계 전체를 삼키고, 이야기는 끝나는 대신 다른 이야기로 계속 미끄러지는, 처음 보는 낯선 작품. 솔직히 읽는 동안에는 “이 작가 양반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쓴 걸까?”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이상하게 그런 복잡하고 낯선 세계를 한 번 경험해 보고 나니 마법같고 판타지 같으면서도 의미와 메시지를 잘 숨겨놓은 작품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아니, 거부감이 없어진 편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보르헤스가 자꾸 떠올랐다. 순한 맛이 보르헤스 작품의 느낌이랄까? 동화같으면서도 마법같은 이야기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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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부모의 별거로 마음이 복잡해진 소년 후안이 여름방학 동안 삼촌 띠또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 삼촌의 집이 보통 집이 아니다. 책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책들이 집을 점령하고 인간에게 방 한 칸을 빌려준 수준이다. 더 이상한 건 그 책들이 얌전히 꽂혀 있지 않다는 점이다. 책들은 숨어버리고, 도망가고, 독자를 시험하고, 어떤 책은 자기를 읽을 사람을 직접 고른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독서는 조용한 취미가 아니라 꽤 험난한 추격전인 것이다. 이 설정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이었다. 보르헤스 작품에서 도서관은 지식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이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도서관도 비슷하다. 다만 보르헤스의 도서관이 사람을 철학적 현기증에 빠뜨린다면, 후안 비요로의 도서관은 그 현기증에 장난기와 성장담을 섞어놓는다. 책과 세계와 독자가 서로 얽혀 있다는 감각만큼은 분명히 보르헤스적이지만, 모험이 넘치면서도 다정한 느낌은 이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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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책을 내가 고르고, 내가 읽고, 내가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책은 그렇게 쉽게 길들여지는 물건이 아니다. 오히려 책 쪽에서 독자를 살핀다. 이 사람이 나를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인지, 아직은 아닌지. 좋은 책을 읽을 때 가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책을 발견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책이 나를 선택해준 것 같은 느낌, 내가 책장을 넘기며 읽는 것 같지만 사실은 책이 내 마음 속을 먼저 뒤적이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은 그 이상한 순간을 아주 귀엽고도 섬세한 판타지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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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에게 까따리나는 첫사랑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책을 더 풍성하게 읽도록 돕는 인물이다. 혼자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문장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갑자기 빛날 때가 있다. 까따리나는 후안에게 그런 존재인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같은 풍경도 달라 보이고, 별것 아닌 말도 마음을 동하게 만든다. 후안이 까따리나에게 건넨 하트 모양 강가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이 계속 변하는 건 책이 변덕스러워서라기보다, 후안의 마음과 읽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다. 혼자서 읽으면 납작하게만 읽히는 문장이 함께 읽으면 더 풍성해지고 더 아름다워지는 것처럼, 사랑도 함께하는 독서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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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완독이라는 목표를 향해 책을 정복하듯 읽을 때가 있다. 그로 인해 책에 대한 피로감이 생기고 이른바 '책태기'가 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책이 나 자신을 더 깊게 읽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좋은 책은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아서 이 책 속의 '야생의 책'처럼 끝없이 찾아가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이 책은 보르헤스의 도서관에서 길을 잃은 적 있는 사람에게는 반가운 농담처럼, 카프카의 불안을 지나온 사람에게는 조금 다정한 위로처럼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이상한 도서관에서 꽤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잃을 수 있을 것 같다.
* 이 책은 열림원(@yolimwon)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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