죔레는 거기에 ㅣ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죔레는 거기에》 크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김보국 옮김, 은행나무 

원제 : Zsömle odavan (2024년)



🐕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소설을 읽을 때는 약간의 설렘과 함께 비장한 각오가 필요한 것 같다.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라서 알게된 헝가리의 작가 크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그의 작품 《사탄 탱고》를 읽었을 때와 유사하게, 이번 《죔레는 거기에》 역시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는 소설은 아니다. 문장은 만연체로 길게 늘어지고, 인물들의 말들은 알쏭달쏭한 부분이 많으며, 헝가리 역사와 정치적 맥락은 아주아주 낯설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도대체 이 사람들이 왜 갑자기 한 노인을 찾아와 “폐하”라고 부르는지, 기사단이니 왕위 계승이니 하는 말들이 어디까지 진심이고 어디부터 망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 책을 읽기 위해 헝가리 역사를 좀 찾아봤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 트리아농 조약, 성 이슈트반 1세, 그리고 빅토르 오르반까지. 낯설긴 하지만 나름 헝가리의 역사를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고, 오늘날 헝가리의 상황이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현상들과 연결되어 있는 지점들이 많아서 아주 흥미로웠다. 


🐕

91세의 요지 아저씨는 “더 이상은 불을 때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 말에는 자신의 인생을 놓아버린 한 노인의 푸념이 들어있었다. 그런 그에게 낯선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요지 아저씨가 헝가리 왕가의 정통 후손이며, 이제 무너진 헝가리를 다시 일으킬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요지 아저씨는 처음에는 그 호칭을 거부하지만, 내용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 호칭이 점점 그를 삼켜간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노인은 어느 순간 “역사적 인물”이 되고, 한 인간의 늙음과 고독은 거대한 민족주의적 서사의 재료가 된다.


🐕

요지 아저씨를 찾아온 사람들은 교사이고, 기술자이고, 경찰이고, 음악가이고, 평범한 이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역사적 사실과 허구, 상처와 향수, 민족주의와 음모론을 뒤섞어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원래 위대했다”

“누군가 우리의 것을 빼앗았다”

“이제 다시 되찾아야 한다” 

어느 순간 미국의 MAGA 세력, 일본과 한국의 우익 담론, 전 세계적으로 반복되는 극우 포퓰리즘의 언어가 겹쳐 보인다. 이 소설이 오래된 왕국 이야기가 아니라 철저히 동시대의 이야기로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런 극우 포퓰리즘에 포섭된 사람들이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이라는 점이 소름끼치도록 현실을 닮아있다는 생각도 든다.


🐕

중반부에 AI, 유튜브, 스마트폰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이 이야기가 과거의 우스꽝스러운 왕정복고극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은 현재의 기술 환경 속에서 더 빠르고 더 쉽게 퍼진다. 문제는 사람들이 실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고 싶은 방식으로 편집한 과거를 붙잡는다는 데 있다. 


🐕

그렇다고 이 소설이 단순히 “극우는 나쁘다”는 식의 풍자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요지 아저씨는 어리석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자기에게 주어진 왕의 역할에 흔들린다. 하지만 그를 마냥 비웃기는 어렵다. 그는 이미 가족에게서도, 사회에서부터도, 자기 자신에게서도 조금씩 밀려난 노인이다. 아무도 자신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어느 날 누군가 와서 “당신은 특별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유혹적인지 생각하게 된다. 요지 아저씨는 극우적 망상의 중심에 세워진 인물이지만, 동시에 그 망상이 어떻게 고독한 사람을 붙잡는지를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

《죔레는 거기에》는 읽기 쉬운 소설은 아니다. 웃긴 장면도 있지만 마냥 웃을 수 없고, 정치적 풍자처럼 보이다가도 어느새 노년의 쓸쓸함이 밀려온다. 결국 이 소설은 가짜 역사와 민족주의적 환상에 휩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 노인이 끝내 붙잡고 싶었던 작은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왕국은 돌아오지 않고, 왕은 탄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죔레는 거기에 있었다. 어쩌면 이 소설이 마지막까지 붙잡는 것도 바로 그 작고 사적인 ‘있음’인지 모른다.


* 위 도서는 은행나무(@ehbook_ )의 독서모임 지원 이벤트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독서모임 진행 후 작성한 서평입니다.



#죔레는거기에 #크러스너호르커이라슬로 #은행나무 #독서모임 #소설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