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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유비둔 1
모옌 지음, 박명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풍유비둔:풍만한 가슴과 살찐 엉덩이>
옮긴이 해설
박명애
모옌의 작품을 연달아 번역을 하면서 나는 근 이 년 동안 하루에 두 시간씩 잠을 잤다. 그래도 신기하게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서너 번은 책상과 함께, 주위의 모든 사물과 함께 내 의식세계가 빙글빙글 회전을 하던 끝에 결국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을 만큼 몇 달 동안 <풍유비둔> 작품에 몰두해 인사불성인 날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책을 이렇게 출판하게 되자 지난 몇 달간의 고충은 먼지처럼 가라앉고, 이 작품이 출간됨으로 인해 많은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혀지고,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모든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다. 작품번역과정 중에서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발견되면 나는 언제나 작가 모옌에게 전화를 걸어 질문을 한다. 작가가 프랑스에 머물고 있건, 일본에 머물건, 홍콩에 머물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문맥상의 흐름상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발견되면 전화를 걸어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이 작품이 출간되면서 나는 우선 원 작가인 모옌에게 감사를 드린다. 나는 오래 전부터 나를 기억하는 내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살아있는, 제법 큰 도서관이라는, 별명을 들어온 사람이고, 도서관에는 필경 고전문학에 대한 향기가 도사리고 있기 마련인데, 굳이 연달아 당대 작품을 번역하는 이유는 작가를 만나 충분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작품을 창작하다 보니 당연히 그럴 수 있겠는데, 간혹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질문을 던지면 작가인 모옌 본인조차 자신의 작품에서 사용한 단어의 의미를 잘 모르는 수 있다. 그럴 순간이면 하루 걸러 다음날 그는 반드시 전자메일로 나의 질의에 상세한 설명을 덧붙인 답장을 보내주곤 한다. 프로의식이 대단한 작가이다.
모옌은 수많은 작품을 창작했다. 그 많은 작품 중에서 작가 자신은 물론이고 번역자인 나 역시 <풍만한 가슴과 살찐 엉덩이>라는 이 작품에 애착이 간다.
이 작품은 세상에 선을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많은 곡절을 겪는다. 검열기관의 비난뿐만 아니라 일반 비평가나 연구자들까지 한 목소리로 이 작품을 비난하기에 이른다. 사연이야 어떻든 이 작품은 그 어떤 작품보다 작가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생각의 깊이는 넓으며, 기세 사납고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넘치며, 전문가들로부터 비난 받을 측면과 찬양 받을 측면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그런 작품이다. 이미 중국에서 생활한 지 십 년이 되는 나는 중국의 이모저모를 알기 위해 휴가철이면 여러 고장을 여행했고, 평소에는 마치 직장이 도서관인 것처럼, 중국의 양대 산맥인 베이징 도서관에서, 상하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중국근대사, 현대사였다. 그런데 이 책을 번역하면서 비로소 피와 눈물로 얼룩진 20세기 중국 역사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유명한 문화대혁명 당시의 지식인 운명, 대를 잇기 위해 혹은 자손을 살리기 위해 식량을 목구멍에 갈무리한 채 구토를 해 자녀를 기르는 어머니, 성장을 거부한 채 젖먹이 인생을 살아가는 상관 금동, 문화대혁명도 끝나고 모든 이념은 사라진 오늘날의 중국, 그 피맺힌 역사를 겪은 후손은 돈을 불에 녹일 만큼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돈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위해 총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30년대의 근대에서 출발해 현 시점의 역사까지 총망라하는 이 소설을 석 달이 채 걸리지 않아서 완성했다는 모옌은 확실히 천재성이 있는, 광적인 작가임에 틀림없다.
모옌은 그의 이름처럼 평소에는 말이 없다. 간혹 만나서 대화를 한다고 해야 본인이 고구마처럼 못 생겼다든가, 한국은 전자제품을 정말 잘 만든다는 식으로 가벼운 농담을 한다. 그런데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한 마디 하면 경직된 표정으로 경청하곤 한다. 그리고 강연을 할 때면 작품을 써내려 가듯이 일사천리로 연설한다. 그는 일 년에 열 차례 이상 국제적인 무대에서 강연을 하며, 중국국내의 대학이나 문학토론장에서도 여러 차례 강연을 한다. 모옌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소설의 테마로 붙잡고 작품을 전개하지만 역사적인 사건을 반드시 접목시킨다. 그래서 그를 두고 중국 국내의 평론가는 신역사주의 소설가라고 부른다. <풍만한 가슴과 살찐 엉덩이>는 신역사주의적이며 민중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이즈막의 강연에서 모옌이 말한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일반 백성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한 사람으로 글을 씁니다.”
그 자신이 바로 대중이며 백성이라는 것이고, 진정한 민간 작품이란 바로 백성의 심정으로 창작한다는 관점인 것이다. <풍만한 가슴과 살찐 엉덩이>은 정사보다는 민간의 역사를 원본으로 보고, 창작의 소재로 삼고 있는데, 한 세기의 역사를 한 가정의 파란만장한 인생 질곡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 민간 대중의 대표적인 얼굴은 어머니이다.
모옌은 어머니를 통해서 중국의20세기 생명여정을 진솔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머니를 둘러싸고 있는 그 많은 사건들, 그것은 피의 역사였으며, 백성들의 집합체이며 백성들의 진실한 모습이다. 그렇다는 의미에서 볼 때 어머니는 20세기 중국 역사의 실체이며, 민간 이념을 대변하는 화신인 것이다. 모옌은 매우 독창적으로 어머니를 대지에다 비유를 하고 있으며, 고통으로 얼룩진 20세기의 중국역사의 진정한 계승자는 어머니 같은 존재가 진정한 주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청나라 말기에 태어난 어머니는 어린 시절, 전족의 고통을 겪으면서 소녀로 성장을 하고, 결혼을 한 뒤에는 무기력한 상관 소우시를 만나 시어머니의 구박 속에서, 짐승처럼 살아간다. 아들을 낳아야 상관 집안에서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들을 낳기 위해서 수많은 아이들을 잉태하게 되고, 그 아이들의 아버지는 고모부이기도 하고, 우연히 마을로 들어온 오리 장수이거나 떠돌이 의사일 수도 있다. 구 남매나 되는 아이들이 성장을 하면서 겪게 되는 사건들은 20세기 중국의 여러 가지 정치세력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머니는 저항할 힘도, 기회도 없이 이십 세기 중국의 정치무대에 말려 든다. 모든 정치 세력들의 쟁탈전의 최종 목표는 단 하나다. 어떤 정치세력이 동북향을 점거해도 고난을 받는 것은 어머니이고, 모든 고난을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기아와 생사의 고통, 가난한 생활로 인해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며 어느 자식은 잃고, 어느 자식은 미치며, 어느 자식은 어머니를 배신하며, 어머니의 눈에 금 덩어리 같은 아들은 사체강간범으로 징역살이를 하게 되지만 어머니는 그 자녀들이 낳기만 하고 마구 던져버리는 후손들을 모두 거둔다. 셋째 딸이 조류 신선이 되어, 낙하산을 타고 비행을 하는 미국 비행사 바비드처럼 벼랑에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은 정치적인 사건과 무관하지만 그 이외의 자녀들은 모두 정치 세력과 싸우거나 결탁하면서 죽어간다. 결국 나중에는 장애자나 다름없는 아들 금동만 남는다. 어머니는 이 작품의 역사주체 기호이며, 어머니가 받아야 하는 깊은 늪 같은 고난의 역사를 작가가 20 세기의 중국인들의 운명에 대해 개괄적으로 표명하고 있다고 보겠다.
어머니는 생명과 사랑을 주는 존재이며, 희생과 동시에 창조의 상징이며, 자연과 생명력의 원천이며, 평화와 인륜과 정의와 용기의 화신이기도 하다. 또한 이 작품의 어머니가 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전쟁과 정치이며, 인류학적 관점으로 보자면 어머니는 바로 대지이다. 모든 물질의 주검을 받아들여서 재생하는 공간이며, 환락과 고통의 상징인데, 어머니가 고집하는 것은 용서와 인간성이지만, 반대하는 것은 상식적인 도덕과 정통성이다. 이 작품의 어머니 개인적 역사는 지극히 비윤리적이다. 쉽게 용납할 수 없는 근친상간, 대를 잇기 위해 누구와도 쉽게 잠자리를 하는 행위, 시부모를 죽이는 행위, 심지어 스웨덴 국적의 목사 마뤄야와 사랑을 하고 한 쌍의 혼혈아를 낳는 등등 어머니의 행동은 파격적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가 어머니의 전형성에 손상을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의 위대함과 불멸하지 않는 원시적인 모성애의 창조력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 작품의 모성이 상징하는 또 하나는 민간의 포용력이다. 어머니는 민간의 생명력과 일반적 관습을 고수하면서 정치를 거절하는데, 결국 정치적인 변화까지 너그럽게 받아 들이는 것이 바로 어머니의 품격이다. 군대와 정치세력은 민간인이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오며 쫓으려고 해도 마구잡이로 어머니의 집으로 진입해온다. 어머니의 행동을 통해서 모옌은 이십 세기 중국 정치와 민간의 생존 방식을 조명하고 있는데, 침략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형상화시켜 서술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생활을 선택할 수 없었고, 관습적인 논리와 생존해야 한다는 그 한 가지 관념만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용납했으며, 이것은 어머니가 바로 백성들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마뤄야 목사를 사랑했지만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다만 상전벽해를 다 겪은 뒤에야 상당히 향토화한 기독교 문화를 승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은 어머니의 근본은 아니다. 어머니는 사랑과 용서로, 어머니를 둘러싸고 있었던 너무나 엄청난 상처를 용해해야만 했으며 그리고 이것은 20세기 일반 중국인들의 유일한 최후 권리였다. 모옌은 이런 참혹한 모습을 시적으로 읊고 찬미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피눈물의 아픔과 연민이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위대한 백성들의 정신이며, 착취와 능욕을 당하면서도 살아 남은 민족성이며, 또한 치욕까지 참아내는 위대한 모성이며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민중의 얼굴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친이 바로 동방의 성모 마리아인 것이다.
<풍만한 가슴과 살찐 엉덩이> 의미는 여기에 머물고 있는 것만도 아니다. 또 다른 중요한 인물도 상징적인 면과 복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많은 비난의 요소가 있는 금동이다. 중국과 서양 혈족이 만들어낸 인간은 사실 이십 세기 중국 지식인의 화신이다. 성격적 약점이 드러내듯 그는 문화적 충돌과 잡스런 교제의 산물이며, 그의 운명은 지난 세기의 지식인이 겪어야 했던 시달림의 역사를 상징한다. 그의 몸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모순적이다. 고귀한 혈통을 이어 받지만 시종일관 정치와 전쟁이 지속되는 환경 속에서, 성장을 거부당한 채 정신 연령이 낮은 유아로 머문다. 그는 지능이 발달되어 있지만 끝까지 쓸모 없는 존재로 전전긍긍한다. 여기서 우리는 금동의 성격이 햄릿과 동키호테를 연상케 하는 정신분열환자로 오해 받고 인정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상관 금동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려면 매우 광활한 시야가 필요하다. 작가가 금동의 행동을 통해서 말하려는 것은, 작금의 인류는 너무도 가리고 감추는 것이 많기 때문에 금동의 생리적 욕구가 확대 해석되고, 비딱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중국과 서양 잡종을 만들어, 작가가 애써 나타내려는 것은 중국인 몸에 기생하고 있는 문화의 이원성이며, 이것은 이십 세기 중국 지식인의 보편적이며 선천적인 약점의 상징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버지가 목사 마뤄야인 금동의 운명은 이십 세기 중국 지식인의 불행한 환경을 상징한다. 그렇다는 점에서 이십 세기의 중국 지식인은 불행하다. 두 가지 이질적인 요소로부터 출생을 했기 때문이다. 서방의 현대 문화와 사상적, 철학적 자원이 중국 지식인을 만들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이 태어나고, 자신의 이웃이 사는 땅에서 살고 있으며, 본토의 민족문화에 대해 기형에 가까울 정도의 연민이 도사리고 있으며 약자의 입장에 놓이지만 자존심은 대단하다. 그들은 주변의 백성들을 계몽하고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보편적인 오해를 받고 있다. 이런 처지와 신분은 루신이 <광인일기>에서 표현한 것처럼 지식인들 그 자체가 깊은 늪에 빠져서 연약하며 변태적이고 아무 것도 책임질 수 없는 무능력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유방에 집착하는 금동의 행동을 해석해 보자. 그의 이런 행동은 정치와 폭력에 대한 공포와 거절이라는 각도도 보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남성의 권력과 정치는 비슷한 것이며 상관 금동의 여성유방에 대한 집착은 정치적 폭력에 대한 반항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금동은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비극을 안고 있다. 탄생 그 자체가 바로 하나의 착오이며 문화적 숙명이다. 그가 겪은 모든 치욕, 오해, 업신여김, 짓밟힘 등등은 지난 20 세기 중국 지식인들의 비통한 역사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금동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것은 또 다른 해석을 요구한다. 어머니가 대지라면, 그는 대지를 걷고 있는 행인이고, 만약 어머니가 행성이라면 그는 행성을 에워싸고 도는 새로운 별이며, 어머니가 성모라면 그는 지옥에 빠져서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이다. 하나의 구조물로 분석해 보자면, 어머니는 구조물의 핵심이며 그는 핵심이 받혀주는 비로소 서 있는 존재가 된다. 소설의 비극적인 미학이 극대화 되는 것은 이 인물을 통해서이다. 그가 태어나는 날, 일본인들이 마을로 진입하고, 스마쿠는 마을 사람들에게 도망가라고 종용하며, 그 뒤 상관 집의 일곱 딸들은 강가에서 소름 끼치는 전쟁 장면을 목격한다. 전쟁과 출생, 신생적인 희열과 죽음의 재난이 동시에 한 가정의 마당에서 벌어진다. 이런 서두는 모옌 문학에서 전례에 찾아볼 수 없는 역사의 전기화, 민속화, 신화적 서술 효과를 거두고 있다.
<풍만한 가슴과 살찐 엉덩이>의 인류학적인 역사 시학이란, 어떤 성질을 돌출시키는데, 즉 그것은 민감하고 풍부한 잠재의식활동을 하는 서술주체(그것은 바로 소설 속의 주인공)인 상관 금동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나”는 기형적으로 성장을 거부한 인물이며, 그로 인해 역사의 변방을 관망해 볼 수 있는 시각을 획득하게 된다. 그는 신체상의 생물적 성질을 최대한 확대함으로써, 역사적 논리학과 사회학에 적재된 물질적 부피의 감량을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며, 그로 인해 인류학적 내용을 강화하고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논리학과 사회학이 정치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하게 하면서, 피해자, 약자, 지식인의 영혼이 깃든 역사적 공간을 새롭게 개척한다. 다른 측면으로 보자면, 소설 작품의 주인공이 약하고 지혜가 없다는 점을 활용해, 소설의 우화적인 측면을 증대시키고 있다.
<풍만한 가슴과 살찐 엉덩이>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역사의 완전성과 역사의 운집이다. 지난 이십 세기 중국의 대륙을 휩쓸고 지나간 모든 중대한 역사적 사건들이 이 작품에 등장한다. 말하자면 독일인의 침입, 그 이후의 새 정부수립, 일본군의 침략, 국민당과 공산당의 투쟁, 공산당이 정권을 쟁탈한 뒤 연달아 일어난 정치 운동, 그리고 구십 년대의 시장 경제까지 모두 한 데 어우러져 하나의 기세 사나운 역사의 강줄기 안으로 흐르게 한다. 상관 집 작은 마당에서 벌어지는, 여러 형태의 정치 세력은 주마등처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주도권이 바뀌면서, 이 집안에서 벌어지는 역사는 거대한 손처럼 구름을 부르고 비를 뿌린다.
가족사소설의 서사적 시점은 비극미학의 맛을 극대화시킨다는 데 있다. 때문에 가족사서술의 특징은 흥성에서 출발해 쇠퇴로 기울며, 혹은 모였다가 흩어지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중국인의 전통적 역사의식에 부합된다. 어떤 가족의 흥망성쇠는 상전벽해적인 윤회의 비극적 미학효과를 획득하면서, 한 역사의 단절감과 폐쇄성을 동시에 조성되게 된다. 상관 가족이 한창 늘어날 때는 인간이 양처럼 많았으나, 결국에는 고아와 과부만 처량하게 남게 되는데, 이것은 역사적 사실 그 자체이며, 동시에 중국인은 이런 비극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역사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 작품을 출간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격려를 해준 李 京 哲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또한 열심히 사전을 뒤적여 준 나의 가족과 작품의 문맥적 흐름에 도움을 준, 오랜 知己인, 이 작품의 해석에 도움을 Professor Yang, Heng-da에게 감사를 드린다.
2004년 2월 12일
중국 상하이에서 박명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