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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처럼 단단하게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평점 :
<물처럼 단단하게>서평.
1. 낮과 밤, 지상과 지하, 적과 황.
<물처럼 단단하게>는 중국에서 출판되자마자 ‘적색(혁명)과 황색(性)의 금기를 모두 어겼다’는 이유로 중국 최고 상부기관으로부터 ‘지명’ 당했다고 한다.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국판 <물처럼 단단하게>의 표지에는 붉은색과 황색이 강렬하게 파도치고 있다. 표지 디자인의 블랙유머가 꽤나 영리하다는 것이 이 책의 첫인상이었다.
문화혁명을 열망하는 아이쥔은 그와 마찬가지로 혁명에 대한 열정과 미색을 겸비한 홍메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혁명 노래를 배경으로 처음 만난 둘은 서로에게 탐닉하듯 빠져들고 뜨거운 혁명에 대한 열정과 이성에 대한 흥분이 뒤섞여 혁명 동지가 되고 사랑을 한다. 그러나 아이쥔과 홍메이에게는 가족들이 있기에, 또한 흠집 없는 완전한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둘의 사랑은 철저하게 감추어져야 한다. 완벽한 비밀과 마음껏 사랑을 나누기 위해 아이쥔은 2년여에 걸쳐 자신의 집과 홍메이의 옷장 사이에 긴 땅굴을 판다. 땅굴이 완성된 후, 둘은 지하의 ‘신방’에서 만나 지하를 뒤흔드는 사랑을 나눈다. 낮에는 지상에서 청년의 뜨거운 열정으로 혁명을 꿈꾸고, 밤에는 지하에서 뜨거운 사랑을 한다. 그러나 두가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혁명의 원동력이 되고, 혁명은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혁명 노래가 들리는 라디오가 있어야만 아이쥔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사랑과 혁명의 관계가 결코 별개일 수 없음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잠시 책 표지 이야기로 흘러가자면, 붉은 색이 위에, 황색이 아래에서 물결치는 책의 표지는 낮에는 지상에서 혁명을, 밤에는 지하에서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정말 심플하게 축약시켜 나타냈다.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마냥 예쁘고 화려한 표지들이 쏟아지는 요즘, 이토록 책의 내용을 잘 반영하고 위트까지 있는 표지가 또 있을까. 거기다 새파란 물결의 띠지까지 더해 감히 완벽하게 미니멀리즘한 표지라고 말하고 싶다.
2. 사랑으로 혁명을, 혁명으로 사랑을.
‘문화 혁명에 관한 책’이라는 것이 <물처럼 단단하게>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기다. 그래서 절반 정도 읽었을 때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조선 혁명가 김산의 삶을 그린 <아리랑> 같은 책을 상상했는데 아이쥔과 홍메이의 사랑이야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두 사람이 사랑을 하는 이야기의 묘사가 꽤나 적나라하고 빈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다 읽어갈 때쯤에는 그 당혹스러움과 ‘과연 이 두 사람이 혁명을 하는 게 맞나.’는 의문은 말끔하게 해소되었다. 그조차도 결국 혁명이기 때문이다.
몇 년만에 면회를 온 아이쥔의 부인인 청구아즈는 아이를 가지고 싶어 당신을 찾아왔다고 말하고, 얼굴과 몸을 어루만지는 아이쥔에게 ‘건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청구아즈가 유난스러운 것이 아니라, 아이쥔이 살던 마을과 사람들의 분위기가 모두 이러했다. 경직된유교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 마을에 아이쥔은 거침없이 땅굴을 파고, 마을의 지하를 가득 둘의 사랑의 소리로 울린다. 둘이 사랑을 하는 그 행위 자체가 이미 혁명인 것이다. 또한 문화혁명으로 인해 사회 분위기는 경직되었고 개인의 자유와 감정은 억눌렸다. 낮에는 그런 혁명을 논하며 밤에는 혁명노래를 틀어놓고 다분히 행위인 개인적인 사랑과 쾌락을 마음껏 누리는 두 사람의 행위는 그 자체로 또 다른 혁명이다. 혁명 사무실에서, 혁명을 위한 작전에서, 또 권위 있는 누군가의 앞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은 단순한 쾌락행위가 아니라 혁명인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의 키스는 책 전체를 통해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나타내는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다.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희생을 억압하는 모순에 대해 두 사람은 떨어지지 않는 입맞춤으로 저항하고 개인의 자유를 온몸으로 외친다. 그들은 사랑으로 혁명을 하고, 혁명으로 사랑을 한다. 아무리 중요한 이념과 혁명이라도 밟히지 말아야 하는 것, 억압받지 말아야 하는 것. 작가는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중국정부는 <물처럼 단단하게>를 ‘지명’함으로 작가가 정확한 곳을, 혹은 그 이상을 명중시켰다는 것을 입증했다. 문화혁명 때보단 나아졌지만 아직까지도 개인의 창작물과 표현에 대해 억압하고 검열하는 중국 정부의 압박 앞에서도 옌롄커는 ‘물처럼 단단하게’ 흘러갈 것이다. 그런 그의 붉은 열정이 <물처럼 단단하게>에서 적색과 황색의 물결로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