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인지 알게 된다" - P17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래서 보이차도 되고 와인도 돼.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같지 않아, 우리 마음이 늘 그러잖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지."
"네. 날씨처럼 변하는 게 감정이지요."
"그런데 이것 보게. 그 마인드를 무엇이 지탱해주고 있나? 컵이지 컵 없으면 쏟아지고 흩어질 뿐이지. 나는 죽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 몸은 액체로 채워져 있어. 마인드로 채워져 있는 거야. 그러니 화도 나고 환희도 느낀다네. 저 사람 왜 화났어? 뜨거운 물이담겼거든. 저 사람 왜 저렇게 쌀쌀맞아? 차가운 물이야. 죽으면 어떻게 되나? 컵이 깨지면 차갑고 뜨겁던 물은 다 사라지지. 컵도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있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아.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거라네. 알겠나?" - P23

"나는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에고이스트지. 에고이스트가 아니면 글을 못 써 글 쓰는 자는 모두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쓰는 거야. 자기 생각에 열을 내는 거지. 어쩌면 독재자하고 비슷해. 지독하게 에고를 견지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만인의 글이 되기 때문이라네. 남을 위해 에고이스트로 사는 거지." - P28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

"매사 귀를 쫑긋하고 들어야겠습니다. 이치를 거스르는 말에민하게 반응하면서요."
"그렇지. 귀를 정확하게 세워서 그런데 그거 아나? 이목구비 중에서 귀가 가장 복잡하고 특이하다네. 눈 코 입은 성형수술하면 다똑같아지잖아. 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 1억 명이 다 모양이 달라평소엔 잘 안 보이고 거저 달려 있는 것 같지만, 귀야말로 얼굴의지문이라고 나는 생각해. 그래서 고흐도 귀를 잘랐지. 귀의 형태는들락날락이 비정형이고 랜덤해. 일종의 카오스지. 소용돌이야. 사람의 인체는 모든 게 정돈되어 있는데, 귀와 배꼽만 정돈이 안 돼있어."
"신기하군요. 귀는 바깥으로 돌출되어 있고 배꼽은 움푹 들어가 - P38

있죠. 말씀을 듣고 보니 귀와 배꼽은 탄생의 블랙홀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엄마 뱃속에서 나온 날을 귀빠진 날이라고 하고, 또 엄마 몸에서 끊어낸 탯줄의 또아리가 배꼽이니까요."
"오묘하지. 시체 해부하는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네만, 검시관들이 시체를 해부할 때는 반드시 배꼽 중심으로 배를 가른다고 해요. 똑같은 배꼽이 하나도 없다는 거지. 그런데도 검시관의 눈엔죽은 사람의 배꼽이 마치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보인다더군. 어머니의 미소로 보인다는 이야기야."
"쓸모없어 보이는 배꼽도 그런 신비가 있었군요!"
"재미있지. 배꼽을 만져보게. 몸의 중심에 있어. 그런데 비어 있는 중심이거든. 배꼽은 내가 타인의 몸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물이지. 지금은 막혀 있지만 과거엔 뚫려 있었지 않나. 타인의 몸과 내가 하나였다는 것, 이 거대한 우주에서 같은 튜브를 타고있었다는 것. 배꼽은 그 진실의 흔적이라네.
혹 배꼽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누워서 몸 위에찻잔을 놓아보게. 어디에 놓을 텐가? 이마? 코? 아냐, 배꼽밖에는없어. 비어 있는 중심이거든.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네. 생명의 중심은 비어 있지. 다른 기관들은 바쁘게 일하지만 오직 배꼽만이 태연하게 비어 있어, 비어서 웃고 있지."
- P39

"모든 책을 다 의무적으로 서문부터 결론까지 읽을 필요는 없네."
"선생님은 그럼 책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의무감으로 책을 읽지 않았네. 재미없는 데는 뛰어넘고, 눈에 띄고 재미있는 곳만 찾아 읽지 나비가 꿀을 딸 때처럼, 나비는 이 꽃저 꽃 가서 따지, 1번 2번 순서대로 돌지 않아. 목장에서 소가 풀 뜯는 걸 봐도 여기저기 드문드문 뜯어 풀 난 순서대로 가지런히 뜯어먹지 않는다고. 그런데 책을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
그 책이 법전인가? 원자 주기율 외울 일 있나? 재미없으면 던져버려 반대로 재미있는 책은 닳도록 읽고 또 읽어. 그 기나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나는 세 번을 읽었어. 의무적으로 읽지 않는다는말이네. 사람들도 친구 사귈 때, 이 사람 저 사람 두루 사귀잖아. 오랜 친구라고 그 사람의 풀스토리를 다 알겠나? 공유한 시절만 아는거지. 평생 함께 산 아내도 모르는데(웃음). 한 권의 책을 다 읽어도모르는 거야. 책 많이 읽고 쓴다고 크리에이티브가 나오는 것 같아? 아니야. 제 머리로 읽고 써야지. 일례로 번역은 창조지만 학술논문은 창조가 아니거든."
"그럼 뭐지요? 논문의 정체성은?" - P41

"발견이지. 이미 있는 것을 찾아낸 것. discover는 cover를 벗기는거야. 재미난 것은 아메리카 대륙 찾아낼 때까지 발견‘이라는 말조차 없었다는 거네. 디스커버는 포르투갈어에서 왔어. 그러면 독창적이라는 말은 어떨 것 같나? 독창적이라는 건 사실 뻥이라는 얘기야 너 혼자의 얘기라는 거지. 개성, originality가 인정받은 것도 19세기 이후 낭만주의가 생기면서부터였네. 그전까지만 해도 오리지널리티는 나쁜 뜻이었어. 보편적인 것을 위반했거든."
"선생님이야말로 평생 보편적인 것을 위반하셨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책은 어떤 느낌이 되길 바라세요? 모두를 안심시키는 보편적인 진리? 아니면 발견되길 기다리는 유니크한 진실?"
"부디 내 얘기를 그대로 쓰지 말게. 자네가 독창적으로 써."
"독창적으로 쓰라 하심은…………."
"인터뷰가 뭔가? inter. 사이에서 보는 거야. 우리말로 대담이라고도 번역하는데, 대담은 대립이라는 뜻이야. 대결하는 거지. 그런데 말 그대로 서로 과시하고 떠보고 찌르면 거기서 무슨 진실한 말이 나오겠나. 위장술밖에 더 나오겠어? 군인들이 전투할 때 왜 위복을 입겠어? 살기 위해서 감추고 색을 바꾸는 거지. 인터뷰는 그래선 안 되네. 인터뷰는 대담對談이 아니라 상담相談이야. 대립이 아니라 상생이지, 정확한 맥을 잡아 우물이 샘솟게 하는 거지. 그게나 혼자 할 수 없는 inter의 신비라네. 자네가 나의 마지막 시간과공간으로 들어왔으니, 이어령과 김지수의 틈새에서 자네의 눈으로보며 독창적으로 쓰게나." - P42

꿀벌을 잘봐. 꿀벌처럼만 하면 좋은 문학이 돼.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랬지. 인간은 세가지 부류가 있다네. 개미처럼 땅만보고 달리는 부류,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사는 부류. 개미 부류는 땅만 보고 가면서 눈앞의 먹이를 주워먹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야. 거미 부류는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지. 뜬구름 잡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이야.
마지막이 꿀벌이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여기저기 비정형으로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벌! 꿀벌에문학의 메타포가 있어.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사람이야. 발 뻗는 순간 그게 꽃가루인 줄 아는 게 꿀벌이고 곧 작가라네." - P53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이라고 그러셨지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맞아. 우리가 잊고 있던 것 속에 진실이 있어. 경계할 것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네. 덮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어. 은폐가 곧 거짓이야.  - P70

"내 인생이 운이 좋다 나쁘다. 그런 평가를 해본 적은 없네."
"운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말 자체가 어쩌면 운이 좋다는 뜻 아닐까요?"
"허허, 따져보면 태어난 것 자체가 엄청난 운을 타고난 거라네.
운 나쁜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해. 세상에 나온 후엔 제 각자 운명의 길을 걸어가지. 다른 소설, 다른 시, 다른 드라마를 사는거야. 인생극장이라고 하지 않나." - P77

"결정된 운이 7이면 내 몫의 3이 있다네. 그 3이 바로 자유의지야.
모든 것이 갖춰진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 그게 설사어리석음일지라도 그게 인간이 행사한 자유의지라네. 아버지 집에서 지냈으면 편하게 살았을 텐데, 굳이 집을 떠나 고생하고 돌아온탕자처럼....…… 어차피 집으로 돌아올 운명일지라도 떠나기 전의탕자와 돌아온 후의 탕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네. 그렇게 제 몸을 던져 깨달아야, 잘났거나 못났거나 진짜 자기가 되는 거지. 알겠나?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수만 가지 희비극을 다 겪어야 만족하는 존재라네."
"선생님! 그런데 그런 자유의지의 일환으로 열심히 노력했는데매번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낙심하는 사람도 많이 봤습니다. 보통사람들은 노력과 운의 부조화를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나는 실력이있는데도 왜 일이 잘 안 풀리냐는 거죠."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은 화는 나겠지만 ‘난 실력이 없어‘라고 - P83

생각하지 않아. 반면 달리기 선수가 백 미터 달리기를 할 때마다 꼴찌 한다면 창피함을 느끼겠지. 여기서 미묘한 이슈가 생겨. ‘모든것이 정해진 운명‘이라고 해버리면 패자는 변명거리가 생겨. ‘내가지는 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운이 없어서‘라고. 숙명론, 팔자론으로 풀어버리면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 났어‘로 모든 걸 덮을 수있네. 가난해도 실패해도 ‘팔자‘ 핑계 대면 그만이거든. 그런데 인생의 마디마다 자기가 책임지지 않고 운명에 책임을 전가하는 건.
고약한 버릇이라네.
마라톤 경주를 하다 갑자기 하늘에서 돌멩이가 날아와서 넘어진사람은 ‘운이 나빴다‘는 위로를 받을 만해. 그러나 인간이 노력할수 있는 세계에 운을 끌어들이면 안 돼. 커트라인 1점 차로 누군가는 시험에 붙고 떨어지지만, 그것도 근접한 수준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이야. 세상은 대체로 실력대로 가고 있어. 그래서나는 금수저 흙수저 논쟁을 좋아하지 않아. ‘노력해봐야 소용없다‘
는 자조를 경계해야 하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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