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오히려 "골프는 인간의 죄를 벌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칼비니스트들이 창조해 낸 전염병"이라고 한 말을 상기해 봄직하다. 오늘 우리 현실은 개인의 기본권이라 할지라도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가차없이 유보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수 계층만이 즐기는 취미는 사회적 계층 의식을 심화시켜 마침내 국력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런 현상은 이른바유신 이념에 부합될 수 없을 것이다. 바람직한 취미라면 나만이 즐기기보다 고결한 인품을 키우고 생의 의미를 깊게 하여,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것이어야 한다. 오늘 나의 취미는 끝없는 끝없는 인내다. 1973 - P16
이 쾌청의 날씨에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벽을 바라보고 좌선을 할 것인가, 먼지 묻어 퀴퀴한 경전을펼칠 것인가. 그런 짓은 아무래도 궁상스럽다. 그리고 그것은이토록 맑고 푸르른 가을 날씨에 대한 결례가 될 것이다. 그저시성거리기만 해도 내 안에서 살이 오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밖에 무엇을 더 받아들인 말인가. 가을 하면 독서의 계절을 연상한다는 친구를 만나 어제는즐겁게 입씨름을 했다. 내 반론인즉 가을은 독서하기에 가장부적당한 비독서지절非讀之이라는 것. 물론 덥지도 춥지도않은 주야장秋夜長에 책장을 넘기는 그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디 그 길이 종이와 활자로 된 책에만 있을 것인가 이 좋은 날에 그게 그것인 정보와 지식에서 좀 해방될 수는 없단 말인가. 이런 계절에는 외부의 소리보다 자기 안에서 들리는 그소리에 귀기울이는 게 제격일 것 같다.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부터 이상하다. 얼마나 책하고 인연이 멀면 강조 주간 같은 것을 따로 설정해야 한단 말인가. 독서가 취미리는 학생, 그건 정말 우습다. 노동자나 정치인이나 군인들의 취미가 독서라면 모르지만, 책을 읽고 거기에서 배우는 것이 본업인 학생이 그 독서를 취미쯤으로 여기고있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닌가 하기야 단행본을 내 봐도껏해야 1,2천 부밖에 나가지 않는데, 어느 외국 백과사전은 3만 부도 넘게 팔렸다는 게 우리네 독서풍토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이 가을에 몇 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술술읽히는 책 말고, 읽다가 자꾸만 덮어지는 그런 책을 골라 읽을것이다. 좋은 책이란 물론 거침없이 읽히는 책이다. 그러나 진짜 양서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 한두 구절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 구절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서란 거울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한 권의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 준다. 그와 같은 책은 지식이나 문자로 쓰여진 게 아니라 우주의입김 같은 것에 의해 쓰여졌을 것 같다. 그런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 즐거울 때처럼 시간 밖에서 온전히 쉴수 있다. 1973 - P18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 P24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방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에서무소유사로 그 방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V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이다. 1971 - P26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생각을 고쳐 먹기로 했다. 조금 늦을때마다 ‘너무 일찍 나왔군‘ 하고 스스로 달래는 것이다. 다음배편이 내 차례인데 미리 나왔다고 생각하면 마음에 여유가생긴다. 시간을 빼앗긴 데다 마음까지 빼앗긴다면 손해가 너무 많다. 똑같은 조건 아래서라도 희노애락의 감도가 저마다 다른 걸 보면, 우리들이 겪는 어떤 종류의 고와 낙은 객관적인 대상에 보다도 주관적인 인식 여하여 달린 것 같다. 아름다운 장미꽃에 하필이면 가시 돋쳤을까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시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하고 싶어진다. - P30
에게이해란 정말 가능한 걸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노라고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이해가 진실한 것이라면 항상 불변해야 할 텐데 번번이 오해의 구렁으로 떨어진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 자유에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있단 말인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이다. - P31
사람은 저마다 자기 중심적인 고정관념을 지니고 살게 마련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물에 대한 이해도 따지고 보면 그관념의 신축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걸 봐도 저마다 자기 나름의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나름의 이해‘ 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우리는 하나의색맹에 불과한 존재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 색맹이 또 다른 색맹을 향해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안달이다. 연인들은 자기만이 상대방을 속속들이 이해하려는 맹목적인 열기로 하여 오해의 안개 속을 헤매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상상의 날개에편승한 찬란한 오해다.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 일지도 모른다. - P32
사형수에게는 일분 일초가 생명 그 자체로 실감된다고 한다. 그에게는 내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오늘을 살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에 살고 있으면서도 곧잘 다음날로 미루며 내일에 살려고 한다. 생명의한 토막인 하루하루를 소홀히 낭비하면서도 뉘우침이 없다. - P40
잘산다는 것은 결코 편리하게 사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선 우리는 보행의 반경을 잃은 것이었다. 그리고 차단된 시야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걷는다는ㅇ것은 단순히 몸의 동작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활발한 사고 작용도 따른다. 툭 트인 시야는 무한을 느끼게 한다. 그곳에는 수직 공간은 있어도 평면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이웃과도 온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속의 얼굴들도 서로가 맨숭맨숭한 타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흙이다. 그렇다, 인간의 영원한 향수 같은 그 흙이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추상적으로 살았던 것이다. 마치 온실 속의 식물처럼. 흙과 평면 공간, 이것을 등지고 인간이 어떻게 잘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현대 문명의 권속들은 그저 편리한 쪽으로만 치닫고 있다. 그 결과 평면과 흙을 잃어 간다. 불편을 극복해 가면서 사는 데에 건강이 있고 생의 묘미가 있다는 상식에서조차 멀어져 가고 있다. 불편하게는 살 수 있어도 흙과 평면공간 없이는 정말 못 살겠더라. 1972 - P43
용서란 타인에게ㅇ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다 - P47
남들을 향해서는 곧잘 베풀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나 자신은무엇을 얼마나 베풀어 왔느냐. 지금 저 소리는 너의 잠을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주기위해 터를 닦는 소리다. 이 소리도 못 듣겠다는 게냐? 그리고 그 일터에는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밤잠도 못 자며땀 흘려 일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저마다 몇 사람씩 딸린부양가족이 있을 것이다. 그들 가족 중에는 지금 입원 환자도있을 거고, 등록금을 내야 할 학생도 있을 것이다. 연탄도 들여야 하고, 눈이 내리기 전에 김장도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보내 주지는 못할망정살기 위해 일하는 소리조차 듣기 싫다는 게냐? 이처럼 생각이 돌이켜지자 그토록 시끄럽고 골이 아프던 소음이 아무렇지 않게 들렸다. - P55
그 길로 부엌에 나가 태워 버렸다. 최초의 분서였다. 그때는죄스럽고 좀 아깝다는 생각이었지만, 며칠 뒤에야 책의 한계같은 걸 터득할 수 있었다. 사실 책이란 한낱 지식의 매개체에불과한 것. 거기에서 얻는 것은 복잡한 분별이다. 그 분별이무분별의 지혜로 심화되려면 자기 응시의 여과 과정이 있어야한다. - 주홍글씨를 읽으며 - P65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목소리를 통해 나 자신의 근원적인 음성을 듣는 일이 아닐까. - P69
인정이 많으면 도심 성글다는 옛 선사들의 말을 빌릴이것도 없이, 집착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든다. 해탈이란 온갖얽힘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자재의 경지를 말한다. 그런데 그얽힘의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집착에 있는 것이다. 물건에대한 집착보다도 인정에 대한 집착은 몇 곱절 더 질기다. 출가는 그러한 집착의 집에서 떠남을 뜻한다. 그러기 때문에 출가한 사문들은 어느 모로 보면 비정하리만큼 금속성에 가깝다. 그러나 그러한 냉기는 어디까지나 긍정의 열기로 향하는 부정의 단계다. 긍정의 지평에 선 보살의 자비는 봄볕처럼 따사롭다. - P75
구도의 길에서 안다는 것은 행行에 비할 때 얼마나 보잘 것없는 것인가. 사람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지식이나말에 의해서가 아님을 그는 깨우쳐 주었다. 맑은 시선과 조용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과 그리고 말이 없는 행동에 의해서 혼과 혼이 마주치는 것임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다. 수연! 그 이름처럼 그는 자기 둘레를 항상 맑게 씻어 주었다. 평상심이 도임을 행동으로 보였다. 그가 성내는일을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한 말로 해서 자비의 화신이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어떻게 사느냐가 문제로 떠오른다. 1970 - P78
이와 같은 학문이나 지식을 나는 신용하고 싶지 않다. 현대인들은 자기 행동은 없이 남의 흉내만 내면서 살려는 데에맹점이 있다. 사색이 따르지 않는 지식을 행동이 없는 지식인을 어디에다 쓸 것인가. 아무리 바닥이 드러난 세상이기로, 진리를 사랑하고 실현해야 할 지식인들까지 곡학아세비겁한 침묵으로써 처신하려 드니,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배반이다. 얼마만큼 많이 알고 있느냐는 것은 대단한 일이 못 된다. 아는 것을 어떻게 살리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인간의 탈을 쓴 인형은 많아도 인간다운 인간이 적은 현실 앞에서 지식인이 할일은 무엇일까. 먼저 무기력하고 나약하기만 한 그 인형의 집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명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무학無學이란 말이 있다. 전혀 배움이 없거나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학문에 대한 무용론도 아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배운 자취가 없는 것을 가리킴이다. 학문이나 지식을 코에 걸지 않고 지식 과잉에서 오는 관념성을 경계한 뜻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지식이나 정보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발랄한 삶이 소중하다는 말이다. 여러 가지 지식에서 추출된 진리에 대한 신념이 일상화되지 않고서는 지식 본래의 기능을 다할 수 없다.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사이비요 위선자가 되고 만다. - P91
<법구경>에는 이런 비유가 있다. 녹은 죄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죄를 먹는다" 이와 같이 그 마음씨가 그늘지면 그 사람 자신이 녹슬고 만다는 뜻이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알아야한다. 그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대인 관계를통해서만 가능하다. 왜 우리가 서로 증오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방향으로 항해하는 나그네들 아닌77. 1975 - P95
하루하루 나 자신의 입에서토해지는 말을 홀로 있는 시간에 달아 보면 대부분 하잘것없는 소음이다. 사람이 해야할 말이란 꼭 필요한 말이거나 ‘참말‘이어야 할 텐데 불필요한말과 거짓말이 태반인 것을 보면 우울하다. 시시한 말을 하고나면 내 안에 있는 빛이 조금씩 새어 나가는 것 같아 말끝이늘 허전해진다. 좋은 친구란 무엇으로 알아볼 수 있을까를 가끔 생각해 보는데, 첫째 같이 있는 시간에 대한 의식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같이 있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면 아닐 것이고, 벌써이렇게 됐어? 할 정도로 같이 있는 시간이 빨리 흐른다면 그는정다운 사이다. 왜냐하면 좋은 친구하고는 시간과 공간 밖에서 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기도를 올려 보면 더욱 잘 알 수있다. 기도가 순일하게 잘될 경우는 시공 안에서 살고 있는 일상의 우리이지만 분명히 시공 밖에 있게 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자꾸 시간을 의식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게되면 그건 허울뿐인 기도다. ~ 우리는 또 무엇으로 친구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렇다. 말이없어도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은 그런 사이는 좋은 친구일것이다. 입 벌려 소리내지 않더라도 넉넉하고 정결한 뜰을 서로가 넘나들 수 있다.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을 뿐, 구슬처럼영롱한 말이 침묵 속에서 끊임없이 오고 간다. 그런 경지에는시간과 공간이 미칠 수 없다.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된다. 똑같은 개념을 지닌 말을가지고도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은 서로가 말 뒤에 숨은 뜻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아가의 서투른 말을 아내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말소리보다 뜻에 귀기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실 침묵을 배경 삼지 않는 말은 소음이나 다를 게 없다. 생각없이 불쑥불쑥 함부로 내뱉는 말을 주워 보면 우리는 말과 소음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씨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꾸만 거칠고 천박하고 야비해져 가는 현상은 그만큼 내면이 헐벗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안으로 침묵의 조명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급한 현대인들은 자기 언어를 쓸 줄 모른다. 정치권력자들이, 탤런트들이, 가수가, 코미디언이 토해낸 말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주워서 흉내내고 있다. 그래서 골이비어 간다. 자기 사유마저 빼앗기고 있다. 수도자들에게 과묵이나 침묵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 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안에 고여 있는 말씀을 비로소 듣는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그소리는 미처 편집되지 않은 성서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는 본질적인 의미는 아직 활자화되어 있지 않은 그 말씀까지도 능히 알아듣고 그와 같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 P100
침묵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아니다. 어디에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만이 당당한 말을 할 수있다. 당당한 말이 흩어진 인간을 결합시키고 밝은 통로를 뚫을 수 있다. - P103
말씨는 곧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또한 그 말씨에 의해서 인품을 닦아갈 수도 있는 거야. 그러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 주고받는 말은 우리들의 인격 형성에 꽤 큰 몫을 차지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소녀들의 입에서 거칠고 야비한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올 때 어떻게 되겠니? 꽃가지를 스쳐오는바람결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운 말만 써도 다 못하고 죽을 우리인데, 언젠가 버스 종점에서 여차장들끼리 주고받는 욕지거리로시작되는 말을 듣고 나는 하도 불쾌해서 그 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고물차에서 풍기는 기름 냄새는 골치만 아프면 그만이지만, 욕지거리는 듣는 마음 속까지 상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대화가 아니라 시궁창에서 썩고 있는 추악한 악취나 다름없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잠시라도 나를 빠지게 할 수가 없었다. 욕지거리가 인간의 대화로 통용되고 있는 요즘 세상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배우지 못했거나 생활 환경이 무질서한 그런 애들과는 달라야 한다. ‘아름답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큰 보람‘ 이란 말을 앞에서 했다. 그럼 아름다움이란 뭘까. 밖에서 문지르고 발라 그럴듯하게 치장해 놓은 게 아름다움은 물론 아니다. 그건 눈속임이지. 그건 이내 지워지고 만다. 아름다움이 영원한 기쁨이라면 그건 결코 일시적인 겉치레일 수 없어. 두고 볼수록 새롭게 피어나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하나의 발견일 수도 있어. 투명한 눈에만 비치기 때문이다. - P134
모든 오해는 이해 이전의 상태이다. 따라서 올바른 비판은 올바른 인식을 통해서만 내려질 수 있다. - P141
말 많은 이웃들은 피곤을 동반한다. 그런 이웃은 헐벗은 자기 꼴을 입술로 덮으려는 것이다. 그런 말은 소음에서 나와 소음으로 사라져간다. 그러나 말수가 적은 사람들의 말은 무게를 가지고 우리 영혼 안에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오래오래 울린다. 인간의 말은 침묵에서 나와야 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기이전에 깊은 침묵이 있었을 것이다. 현대는 정말 피곤한 소음의 시대다. 카뮈의 뫼르소가 오늘에 산다면 이제는 햇빛 때문이 아니라 소음 때문에 함부로 총질을 할지 모르겠다. 1972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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