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 - 인간과 자연, 과학과 정치에 관한 가장 도발적인 생각
브뤼노 라투르 지음, 이세진 옮김, 김환석 감수 / 사월의책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과학인문학이란 생소한 용어가 과연 있을 수 있는 것일까란 의문부터 들었다.세상에는 정말 사고의 영역이 넓고 유연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조금 달라질 움직임이 보이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 자연계와 인문계를 나누어 대학입학 전형 때에도 그 선을 넘지 못하도록 만든 교육제도 안에 갖혀 산 덕분(?)인지 내 안에는 당연스레 자연과학vs인문사회로 구분하는 것이 고착된 지 오래이다. 그런데 이 프랑스의 과학자는 자연과학과 인문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묶어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 낸 것이다. 이 신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편견을 말끔히 지운 후 처음 태어난 아이처럼 오직 이 이론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 첫 번째 도전이 과학기술의 자율성을 다시 생각하기였다. 당연히 과학기술이란 어느 일정한 실험조건이 갖춰진 상태에서는 누가 어느 나라에서 실험을 하든 같은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중립적이며 동시에 정치와 사회, 문화적 구속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아! 그럼에도 한 가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건은 바로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교회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고 다시는 그런 신의 창조설과 반대되는 개념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억지맹세까지 받고서야 풀어 준 사건...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자연과학이 결코 정치와 종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준 사건이다. 허나 왜 다들 그 사건을 종교의 탄압으로만 말할 뿐 과학과 정치의 관련성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일까!

 

또한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브뤼노 라투르가 상당한 다독가라는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분야에만 박식할 뿐,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실망감을 금치 못할 정도로 무식(?)한데 반해 브뤼노 라투르는 역사와 인물들, 그리고 시대적 배경과 경제,정치적 현실에 까지 훤히 꿰 뚫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는 아르키메데스와 화가로 널리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당시 통치자에게 자발적으로 전쟁무기를 개발해 바친 일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무고한 생명을 죽을 수 있는 획기적이고 무시무시한 무기들을 만들어 바쳤다라는 사실은 그들의 명성에 가려 진실을 왜곡한 것이기 때문에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다. 다빈치의 경우엔 더 심해서 실제 전쟁에 사용되어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고 그 대가로 왕에게 작위와 토지를 하사 받아 신분상승과 경제적 부를 동시에 이루게 된 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그렇게 과학자들이 현실에서 대가를 받아 챙기기 위한 수단으로써 과학을 이용한 것을 어이없게도 성스런 이미지로 포장을 하다니...

 

 

과학과 사회,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역사가 진행될수록 더욱 밀접해진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인간의 행위, 기술의 사용, 과학을 통한 경유, 정치의 침입을 구분하기가 '점점 더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물질화는 사회화요, 사회화는 물질화다라고 자신의 주장을 더욱 구체화 시켰다. 이 주장에 대해 나 역시 생각해 보는 것은 현재 정부나 사회기관들이 계획하는 사업 가운데 과학기술과 관계가 없이 오지 행정적으로만 구상이 되는 일이 있을까라는 것이다. 실로 감탄할 만한 주장이다. 의료제도는 물론, 농업정책 역시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는 정책을 수립할 수 없다. 그의 식견이 대단히 정확하다. 또 하나의 주장은  과학에 대한 우리의 가장 큰 오해는 과학을 단지 '인식의 문제'로만 보는 데 있다이다. 그 이유는 과학이 가진 야누스의 얼굴 때문인데, 과학은 공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진리'로 여겨지지만, 실상은 실험실 속에서 의도치 않은 시험과 실험을 거치면서 끝없는 경합과 협상의 과정을 통과하는 사회적 존재로서 존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학의 탄생과 변형을 '인간'과 '물질'이라는 행위자들의 견지에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인문학의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라는 명확한 개념설명을 했다.

 

총 다섯 편의 편지형식을 되어 있는 그의 가설과 주장을 읽으며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 동안 나는 왜 과학의 속성들을 당연시 여겼던가이다. 한 번 정도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었고 교수님과 반대되는 의견을 갖을 수도 있었는데 왜 이처럼 가르쳐 주는 대로 받아 적고 외우고 도입하는 것 밖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나 생각하게 되었다. 교욱현실이란 것이 도무지 가르치는 자에게 자신의 색다른 생각이나 의견을 발설하는 것이 도전이며 반항이며 무례라고 여겨지는 통에 고분고분 교수님 말씀이 다 옳아요, 맞아요 라고만 순응하다보니 어린 시절부터 뇌가 생각을 못한 채 굳어져 버린 것 같다. 만약 프랑스의 교육처럼 교수와 학생이 동등한 입장에서 학생이 자신의 생각에 대해 자유롭게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수업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라고 인정을 받는다면 당연시 여김을 받는 많은 학설들이 새롭게 그 진면목을 발견할 수도 있을 텐데 그래서 한국 땅에서는 자연과학을 계속하려면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방을 메고 떠날 수 밖에 없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는 풍토가 부럽기만 하고 젊지 않은 이 과학자의 신개념을 어렵지만 진지하게 읽는 동안 내 뇌가 진동을 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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