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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시집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10월
평점 :
박노해와 같은 시인을 기인이라고 한다. 아니, 현실을 제대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통찰력과 함께 가만히 입다물고 자신의 일만 하기에도 바쁜 세상에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거침없이 세상에 쏟아 놓는다.
동시대에 살면서도 세속에 살면서도 이렇게 다른 시각으로 세상과 사람을 볼 수 있는 이가 어디 있으랴! 김삿갓이라 알려진 김병연의 기인스러운 행동처럼 박노해에 대해 알려진 것 또한 그가 쓴 시와 그가 하는 행동에 대해 문학사 쪽만 아니라 역사에도 기인으로 평가될 것이다.
시인의 시가 여자의 맨 얼굴처럼 그렇게 솔직할 수가 없다. 아무렇지도 않게 온 갖 속 마음을 다 펼쳐서 열어 보여주니 적잖이 당황스럽다. 오히려 조금은 덜 보여주어도 될 것 같건만 시인은 그러질 않는다.시인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너무나 악한 세태 속에서 살다 보니 쉽게 다가오질 않는다.
삼성전자의 처녀들은 하얀 우주복을 입고
독한 납용액과 1급 발암물질 벤젠과
날카로운 전자파와 방사선을
복숭아빛 발그란 몸으로 빨아들여
모든 것이 하애져
핏속까지 하애져
붉은 피톨도 푸른 눈물도
우리들 살아있는 모든 것이
황유미처럼 박지연처럼
하애져
새하애져
<삼성블루 中에서>
그렇다고 날카로운 칼끝처럼 찌르고 째는 그런 시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시인이 담담하게 쏟아 놓는 그 언어들을 옆에서 가만히 들으면 마음이 찢어지는 것을 느낀다. 왜 그럴까? 마음이 움직인다. 이 시대를 바라보며 기만당하고 내 몰리는 신세에 처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닌데 왜 이렇게 남의 일 같지 않고 아플까!
시를 통해서 덮어 버리고 살고 싶은 이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느꼈다. 한 번도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가치만으로 존중받지 못한 사회에서 가장 청아한 목소리로 우는 새처럼, 그렇게 아름답구나!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채
나는 왜 이렇게 삶을 서둘러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 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한그루도 심지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 왔다.
나는 삶을 지나쳐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왔다>
자신과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경지까지 몇 마디의, 몇 줄의 생활어로 자신을 풀어나갔다. 나는 너무 천천히 느리게 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반면 시인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로 왔다며 자신을 지나쳐 왔다라는 역설을 펼친다.
아픔과 고통이 많은 땅, 한바도에서 평화와 안정을 갈망하는 대중들에게 시인은 관심 밖의, 그러나 삶의 뿌리에 근접한 이야기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고 과장됨이 없이 펼쳐 놓는다. 그 푸른 시의 잔디에 누워 잠시라도 내 삶의 터전이 그래도 누울 수 있는 평평한 지구라는 것에 감사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