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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 헤엄이 ㅣ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15
레오 리오니 지음, 이명희 옮김 / 마루벌 / 199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으뜸 헤엄이는 레오 리오니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얼마 전에 지각대장 존을 보면서 요즘 그림책엔 삽화대신 미술관에서나 봄 직한 작품 수준의 그림이 들어있다는 것을 새롭게 접하고 놀라긴 했지만 바다를 무대로 한 이 책 속 그림 또한 매우 큰 놀라움 그 자체였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이란 버나뎃 로제티슈스탁이 글을 쓰고 캐롤라인 제인 처치가 그림을 그려 전 세계적으로 유아들에게 인기가 높은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처럼 전체적으로 선이 명확하고 둥글둥글해서 인형처럼 아기자기한 그림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 예상은 전혀 빗나가고 말았다.
왜냐하면 단순히 형태 잘 잡힌 알록달록한 회화라기보다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책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판화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감자와 고구마도장으로 여기저기 쿵쿵 찍어 모양이 겹쳐지고 다양한 색깔이 섞여서 자유롭고 신비한 바다의 경이로움을 매우 잘 표현한 것이 가슴을 넓히고 생명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어딘지 꽉 짜여지고 체계적으로 완벽해서 세련미가 돋보이는 어른들의 세상과는 딴 판인 어설픈 아이의 솜씨가 묻어나는 흙과 같은 생명력이 느껴지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정말 리오니 혼자서 만든 작품일까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어떻게 그토록 아이들의 순수함과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함을 어른이 되어서도 잃어버리지 않고 누릴 수 있눈 것일까!
주인공 으뜸 헤엄이는 길이 1cm도 채 될까말까한 검은 점과 같은 작은 물고기이다. 친구들이 한꺼번에 다랑어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건이 터졌을 때 뛰어난 헤엄솜씨 덕분에 혼자서만 살아남았다. 생명은 구했지만 그 넓은 바다 속에서 가도가도 늘 혼자일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구경하는 외로운 검은 점 헤엄이와 달리 바다는 무지개빛 해파리와 물지게를 지고 가는 것처럼 통통한 가재, 그리고 이름모를 물고기 3마리는 몸통과 지느러미의 색깔이 오묘하게 물감이 번지고 섞여서 참으로 아름답고 신선했다. 특히 뱀장어는 처음 보는 나에게는 갈치로 오해를 받았는데 수묵채색화를 보듯 그 기법이 매우 독특한 동양적인 그림이라 보고 보고 또 보아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으뜸 헤엄이는 기능적인 헤엄만 잘 치는 것이 아니라 무척 용감한 아이다. 마침내 끝 없는 바다를 여행하다가 자신과 꼭 같은 모양을 한 물고기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모두 빨강색인 반면 헤엄이 자신만 검정색임에도 전혀 움츠러들거나 그들과 다르다고 따로 놀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속에 들어가서 자신이 먼저 보고 온 놀랍고 신비로운 거대한 바다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고 싶어서 함께 놀고 구경다니자며 그 작은 물고기떼들을 세상 밖으로 이끌어내는 모습에서 흡사 오합지졸의 이스라엘 민족을 억압의 땅 이집트로부터 탈출시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게 했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지도자 모세를 보는 것 같았다.
강자에게 빌붙거나 그 비위를 맞추며 비굴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자유를 선택한 점이 역시 동양권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늘 부럽고 아쉬운 마음이 들게 한다. 세상의 주인은 힘 센 권력자나 일부 귀족층이 아니라 작고 힘없어 보이는 일반 대중의 것임을 일찍부터 깨달은 서구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그 속에서도 느꼈기 때문이다.
헤엄이는 늘 숨어지내고 피해다니기만 하는 그 작은 물고기들의 마음을 움직여 덩치가 큰 거대한 세력에 맞서 싸워 자신들이 이 넓고 아름다운 바다를 마음껏 누릴 권리와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기에 ,특히 아무리 작고 보잘것 없어보이는 약자들이라 하더라도 함께 마음과 힘을 모으면 어떤 독재적 횡포와도 맞서 싸울만큼 강해진다는 것을 커다란 빨간색 물고기 안에 검은 눈동자로 잘 표현하였다.
으뜸 헤엄이는 스토리 중심이 아니다. 보는 것,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중심이다. 각 페이지마다의 글과 그림을 보고 있는 동안 녀석이 즐거워하고 만져보기도 하고 깜짝 놀라기도 하면서 반응을 보였다. 분명 활자화 된 문자가 전해주는 메시지보다 훨씬 크고 강한 그림이 주는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이 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어른들이 보기에도 다양한 생각과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비록 벽에 걸어두고 남들에게 자랑은 할 수 없지만 혼탁한 내면이 밝고 맑아지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진정한 명작이 전해주는 생명력이 흘러넘치리라 확신한다. 다만 끝맺음이 조금 비약적이긴 하지만 자유를 향해 용감하게 맞선다는 주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