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왕은철 옮김/ 현대문학
前作 『연을 쫓는 아이』를 마치고 바로 잡았다.
동일 작가의 작품을 이어 읽는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끌어 당기는 재미가 있다.
첫 작품에서는 자주 찡한 마음으로 눈물을 보였지만 여기서는 비교적 담담한 자세가 될 수 있었다. 작가 성향에 기반을 두어 벌써 단련된 탓일까. 암튼 세 번째 소설 『그리고 산이 울렸다』은 시간차를 두고 봐야 멜로드라마 무드를 다시 향유하지 싶다.
출판사 ‘현대문학’은 출판계에서 중량급 이상에서 포진하는 회사인데 이 좋은 소설의 표지에 ‘2007년 미국 최고의….영화화 결정!’이라는 군더더기 소제목을 첨가할 필요가 있었을까? 어떤 조심스런 독자에게는 이런 문구가 도리어 선택을 주저케 하는 반감을 심어주지 않을까?
행복은 오직 무난히 찾아오는 법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애초 행복한 생활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있지만 암만해도 스스로는 깨달을 수 없기도 하다.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도, 소설을 통해서도 관통하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전쟁을 치르는 군인이나 게릴라가 아니어도 가만히 앉아있는 집안에서 무작위로 쏟아지는 로켓포에 즉사하는 현실에서도 별 세계가 있어 남성우위의 폭행까지 얹어지는 지독히 음울한 여건에서도 살아남은 공과가 있어 평범한 가정생활로 귀착하는 것에 조차 우린 행복을 맛보아야 한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라일라’와 ‘마리암’이 한 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신의 축복이자 대단한 행복이다. 아프간의 환경으로 보아 논픽션일수도 있는 이런 사정을 거의 알 수 없었고 경험하지 않은 나와 내 주변사람들은 또 그 동안 얼마나 행복했으며 대한민국의 제 여건이 아프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월하니 살아생전 내내 행복하다는 등식도 가능하다.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인가.
‘진정한’이라는 수식어가 있는 만큼 ‘마리암’이 아닐까.
어머니 ‘나나’는 항상 구박했지만 그 구박은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이었고 아버지 ‘잘릴’은 친절하고 자상하지만 면피용이다. 15세 소녀가 강제로 30년 연상 홀아비에게 시집갔으나 거듭되는 유산으로 배우자 취급보다는 불만해소용 하인쯤으로 전락한다. 마침내 ‘라일라’의 등장으로 절정에 이르는 치욕과 수모는 차라리 반전된다. ‘라일라’의 어머니 언니 친구가 되어 폭군 ‘라시드’앞에선 연합군이 되어 ‘라일라’를 살리기 위해 예기치 않게 ‘라시드’를 살해한다. 총살형을 언도 받는 재판정에서 서명, 27년 전 강제 결혼식 때 서명과 더불어 일생 동안 단 두 번의 서명은 그녀에게 절대 절명이자 반전 없는 전환점이다. 잡초였지만 ‘라일라’와의 조우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은 사람이 되었고 마지막 독백은 간단하지 않은 생각을 남긴다. ‘이렇게 죽는 것은 그리 나쁜 것이 아니다. 이건 적법하지 않게 시작된 삶에 대한 적법한 결말이었다’라고.
공식적인 전쟁이 아닌 거주지에서 수시로 벌어지는 전투의 와중에서도 일상이 전개되는 것, 남자들에게 성욕이 존재하고 애들은 뛰어 놀고 인간적인 탈레반도 있으며, 뭣보다 재판정도 개정한다는 내용은 그래도 사람은 살아가게 되어있다는 걸 대변한다.
‘라일라’가 딸 ‘아지자’를 고아원에 맡기고 헤어지는 장면에서 딸의 행동거지를 설명하는 부분 ‘발을 질질 끌며 가는 모습..’ ‘말을 더듬던 것에 대해…’ ‘단층에 대해..표면에서 느끼는 건 약간의 흔들림 뿐이라고…’에서는 그 다음의 전개를 위한 복선으로 봤는데 소설을 마칠 때까지 연결되지 않았다. 내가 과장되게 민감했던 것 같지만 혹 작자가 소설을 마무리하면서 깜박 잊은 건 설마?
‘라시드’로 인해 처음엔 ‘마리암’이, 나중엔 ‘라일라’도 겪게 되는 불안감은 경우는 아주 다르지만 유사하게 경험한 난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 그 불안한 마음을.
또 ‘타리크’와 4인 가족을 이루어 평화스런 생활 중에서도 불안한 꿈을 꾸게 되는데 역시 동감이다. 육군병장으로 군복무를 마친지 30년 이상 경과한 후에도 군대 꿈을 꾸곤 아침에 일어나 군인신분이 아닌걸 알고 한 숨을 쉬며, 직장인 시절로 되돌아가 일 마감시점을 놓쳐 안타까워 하고 역시 잠 깨서는 그 때가 아님에 안심하는 것이다. 생사의 문턱을, 인간으로서 막다른 길에 까지 다다른 경험에 몸부림쳐야 했던 아프간 여인네들에 비하면 찻잔 속의 태풍도 못되건만.
전작 ‘연을 쫓는…’은 역자가 이미선 님, ‘천 개의…’는 왕은철 님이다.
일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밝히고 소견을 적는다.
이 미선 님의 것에 비해 왕은철 님의 번역본은 좀 더 신경을 써서 읽어야 한다.
‘아무개가 ~~~다. 그리고 그가~~~. 그녀는~~’ 등으로 사려있는 독자는 ‘아무개’ 후에 전개되는 ‘그’나 ‘그녀’가 누구인지 단박 파악하지만 가끔 나 같은 독자는 ‘그’와 ‘그녀’가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다시 앞줄로 거슬러 봐야 하는 시간낭비가 있었다. 다소 우매한 나 같은 독자를 위해서라도 연결되는 문장에서도 친절심을 발휘하여 재차 인명을 기재하여 서술해주시면 좋겠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카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17세기 페르시아 시인의 시에서 차용한 제목인데, 우리가 같은 문화권이었다면 그 공감은 대단했을 터. ‘마리암’의 적법하지 않게 시작된 삶이 마침내 적법하게 마무리되면서 만신창이 카불도 아름다울 수 있어 천 개 만큼의 찬란한 마음이 될 수 있으니 인간이여, 삶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