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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9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임용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둔황』 이노우에 야스이/ 임용택 옮김/ 문학동네
부산 지하철 2호선 중동역과 지게골역까지 운행시간은 정확히 22분이다. 7월 중순 시대흐름의 압박으로 마침내 스마트폰으로 갈아탔다. 결과는 무지 만족. 바꾸기 전까지 출퇴근 지하철 속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스마트폰을 응시하는 승객들을 바라보며 개탄했다. ‘책을 읽거나 눈 감고 잠을 불러야 할 자투리 시간에 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느냐’고 힐난했다.
그런데…부끄러울 정도로 예찬론자가 되었다. 의도적으로 운행하던 차를 사무실 근처 주차장에 세워두고 지하철을 탄다. 자주. 자동차 연료비용도 아낄 겸 독서와 음악감상을 위해서이다. 특히 귀가 길엔 거의 종점에서 지하철을 이용하므로 100% 앉아서 간다. 『둔황』은 주로 지하철을 오가며 이어폰을 통해 음악감상하며 여유롭게 바라본 책이다.
둔황 하면 서유기의 모델인 현장스님, 실크로드, 타클라마칸, 위구르 라는 단어들이 떠오른다.
엄연한 역사이면서 옛 인물들의 숨결이 들리는듯하고 서역으로 출정하는 관문으로 한족, 몽골족, 티벳족, 위구르족 등 다양한 민족들이 격돌한 중앙아시아가 그 동안 서양사관에 가려져있다 이제 조명을 받는 지역이기도 하다. 1960년대 초 일본의 경제발전 여파에 힘입은 바도 있겠으나 당시에 이를 소재로 소설을 창작한 일본의 저력은 칭찬할 만 하다.
일단 손에 쥐면 놓치기 어렵다. 우선 복선을 흘리고 들어가는 처음부터 재미가 쏠쏠해 계속 책장을 넘겨야 한다. 덤으로 옮긴이의 번역이 무척 매끄러워 우리 작가의 소설을 보는 것과 똑 같다.
해설편의 언급대로 주변정경의 묘사도 리얼하다. 작자가 막상 둔황을 여행한 것이 출판 후 20년이 지난 후라고 하며 그 간극은 문헌을 통해 지속적으로 연구했다고 하는 자세도 대단하다.
역사와 민족과 종교를 통한 인간의 삶을 묵묵히 응시해온 위대하고 유구한 자연을 본다는 해설도 와 닿는 글이다. 그런데, 위구르 여인으로부터 건네 받은 조행덕의 목걸이를 목격하곤, 목걸이는 두 개이다, 다른 하나는 누구에게 있느냐, 소지한 자를 찾아내어 죽이고서라도 획득할 것이다 등등 두텁게 제시되던 복선이 말미에는 터진 실 뿐 산산히 흩어진 구슬처럼 복선 역시 허무하게 뭉개어져 허전한 느낌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속았다는 느낌은 나 뿐인가?
물론 주왕례의 경우, 치열한 접전 중에 애지중지하던 목걸이가 사라짐과 동시 죽음을 맞이한다는 설정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집요하게 목걸이를 소유하고자 하는 위지광의 행동거지로 보아 결말엔 극적인 반전이나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개할거라는 기대야말로 그 사막-타클라마칸쯤 되겠다- 에 묻혀 망연자실하게 된다.
위구르 왕족 여인과의 조우에서 불심이 시작되고 여인의 죽음으로 종교적 성찰에 도달하는 조행덕의 불심인데 그 연결고리도 좀 느슨하게 보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인연설과 닮은 꼴인데 제한된 지면이지만 각성하고 심화되는 조행덕의 내면을 좀 더 다루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한편 조행덕과 여인의 우연한 조우는 소설 태백산맥에서 정하섭과 소화의 만남을, 소설 동의보감에서 허준과 곤궁에 처한 사대부 집 딸(부인이 된다)의 조우를 떠올리게 되는데 개똥철학的 관점에서 보면 남녀의 러브스토리는 필연적으로 우연, 숙명, 운명적으로 미팅이 시작되는 데서부터이다. 믿거나 말거나.
학교에서 배워온 세계사를 놓고 보면 중국 미국 유럽, 그리고 러시아 외엔 등장하지 않는다. 근래 책을 통하여 실체를 보는 실크로드의 무대인 중앙아시아는 그 동안 존재하지 않았었다. 서구에 함몰된 비뚤어진 역사관의 산물이라는 자각이 이제야 고개를 드는 것인데 그 동안 가려졌던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소프트웨어的 측면은 얼마나 왜곡되었을까.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이 역사 또한 그들 위주의 역사관으로 도배질하는 원리는 여기 대한민국에서 작동된다. 위안부는 1941년 이후에서야 제도화되었으며 자발적으로 따라 나섰다거나, 안중근과 유관순 등은 테러리스트, 일제치하 덕분에 왕조시대를 끝장내고 현대국가로의 이행에 순기능이 있었다는 친일사관이 고교 교과서에 실릴 판이고, 심지어 차기 대선주자로 나서겠다는 대표적인 친일파의 아들 김무성은 이런 교과서를 두둔하는 판이다. 탐탁치 않은 선거의 결과로 여당의 입지를 굳힌 측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입맛대로 만드는 꼴이란!
어느 책에서 번쩍 뜨이는 글귀가 있었다.
국민은 영원히 성숙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사실에 기초하여 국가의 품격을 위해 첫째, 포퓰리즘에 에 좌우되지 않는 진정한 엘리트 집단을 육성해야 하며, 둘째, 논리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풍부한 정서(교양)를 길러야 하는데 이는 수학이나 문학처럼 눈앞의 이익에 직결되지 않는 행위에 몰두하는 인간이 많을수록 국가의 품격-나아가서는 국익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에 『둔황』은 독서여건 조성에 안성맞춤이다.
때묻은 마음으로 복선, 연결고리를 빌어 힐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번역과 소지하고 다니기 좋은 반 양장판 외형도 깜직하다.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는 후반에 역사소설에 몰두하였다는데 그렇다면 일본판 월탄 박종화 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