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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자기앞의
생』 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때는 1970년이고 프랑스 빈민가쯤 낡으며 엘리베이터가 없는 7층 건물의 주택가에 산다.
불량끼 많으며 조숙하고 정신 말짱한 회교도 ‘모하메드(줄여서는 모모)’는 ‘로자’아줌마와 함께 살며 아줌마의 원대로 병원 행을 거부하며 아줌마를 끝까지 보호한다.
모모는 정신이상자인 아버지와 창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엄마를 죽여 궁여지책으로 로자 아줌마에게 유상으로
맡겨진다.
폴란드계 유태인인 로자 아줌마도 창녀출신으로 50줄 이후엔 7층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제때 피임을 못해 출산하게 된 창녀들의 자녀들을 유상으로 돌보는 걸로 생계를 유지한다.
7층 구조의 열악한 아파트 거주자 중 본디 프랑스인은 오직 1명이고, 나머지는 아랍계, 아프리카
흑인, 동성연애자 등 쉽게 표현하여 열악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나 서로 돕고 정겨운 좋은 이웃들이다.
젊어서는(15세 때 사진을 봐서) 예쁜
여성이었고 엉덩이로 먹고 살았던 로자 아줌마는 예순을 후딱 넘긴 근래 뚱뚱한 몸매와 신체 곳곳의 이상징후로 조만간 운명할 조짐을 보였는데, 마침내 모모가 온 힘을 다하여 아줌마를 모시는 곳이 평소 준비되었던 지하실이었고, 수양엄마(로자 아줌마)사후 3주일 동안 함께 머무르다 이웃들에게 발견되고 구조된다.
아주 오래 전 읽었던 도서인데 씨줄 날줄에 해당하는 내용에 관해 별 기억이 없다.
마지막 장면 정도는 희미하나마 알겠고, 책장을 덮으며 뭔가 뭉클하고
애잔한 느낌은 있었다.
당시 출판사는 ‘문학사상사’였는데
요즘은 이 출판사 책들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과거로의 회귀라 해야 하나.
인상 깊었던 소설을 찾아 다시 뒤적이게 된다.
레마르크作 『개선문』이며, 헤르만 헤세作 『데미안』이
그렇다.
부산역을 마주 바라보던 달동네가 지금은 빌라주택으로 탈바꿈했고 골목길은 온데간데 없는 옛집 주위를 작년 가을
저녁에 걸었던 적이 있다. 당시 명칭이었던 모교 ‘초량국민학교’ 주변도, 의자 위에 나무 판을 걸쳐놓고 보통 ‘스포츠가리’로 이발했던 이발소가 있던 자리를 스치기도 했다. 저기 아래에는 양공주와 코쟁이 군인들이 활보하던 ‘텍사스 거리’도 있었다.
그래, 과거로 회귀 말자. 향수를
맡지 말자. 누구의 삶이 아닌 현재 나의 삶, 자기 앞의
生이니까.
“죽을 때까지 병원에 입원시켜 놓으면 노인들은 더 심한 우울증에 빠져버릴
거라고 했다”(p193)는 구절은 현대의 한국에서 주목해야 할 경우이다.
많은 요양병원에서 치매나 다른 병명으로 노인네들이 입원, 아니 수용되어
있다고 보겠는데, 요양병원 측에서는 고객인 노인들이 바로 운명하지 않을 정도의 식사와 신체장해의 급격한
악화만 방지하는 선에서 장기간 수용하는 것이 목표(?)라 할 것이다.
정신은 말짱하시고 단지 무릎관절 악화로 제대로 걷지 못하여 가족들의 일손을 덜려는 뜻에서 요양병원에 입원했다가 완전히 정신이 망가져
치매 끼 까지 보이다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운명하셨다는 경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요양병원입원이 결코 능사가 아니고 정말 노인에게 필요한 건 관심과 배려, 즉
정을 받는 것이다.
소설 중 로자 아줌마도 정의 결핍을 두려워했을 것이며 모모는 이 점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엉덩이로 밥벌이 하는 여자-창녀-성매매로
알고 보면 매춘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궤를 함께 한다. 집창촌을 봉쇄하면 풍선효과로 주택가로 스며들어
결론적으로 단속의 효과는 미미하다고 한다. 울 나라에선 지난 대선 때에 “문재인은 정치적 창녀이다”라는 거침없는 언사의 혁혁한 공(?)으로 푸른 집 대변인으로 낙점 받은 ‘윤창중’이 있었는데 기실 창녀의 인간성마저 욕보이게 한, 전무후무한 금수였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창녀는 창녀일 뿐 속임수나 협잡은 아닌 것이다.
자꾸 옆길로 새는 감이 있다.
지극히 행로가 달라야 할 회교도 소년과 유태인 할머니 사이의 情을 담은 소설이다.
고아인 영특한 꼬마가 수양엄마의 보호자가 되어 자유로운 환경에서 임종을 맞도록 돌본다.
情을 매개로 하는 사랑. 알고 보면 주어야 받고,
받아야 주는 것이고 더불어 정을 담는 것이다.
쌍방향이 아닌 일방적인 사랑은 신이 아닌 한 어렵다. 業報, 인과응보인 것이다.
자기 앞의 생은 환경의 산물로 간택된 타인을 우회하여 나에게 감성으로 다가오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