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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39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박형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닥터
지바고』 보리스 빠스쩨르나끄/열린책들
2박3일 동안 2권으로 된 책을 들었다.
혁명의 광기와 뒤따른 전쟁으로 찌든 인생살이이자 이에 스민 사랑의 이야기가 모스크바와 시베리아 너머를 오가며
전개되는 배경은 1905년과 1917년 혁명의 산물에서 왔다.
책을 덮자마자 인터넷으로 뒤져 영화를 잠깐 잠깐 돌려본다.
아쉽게도 적군 준장이 동생이 아닌 형으로 전개되는 둥 몇 군데서 원작과 달리 영화는 극적 요소를 극대화하기 위해
각색된 것 같았다.
2년 전 초여름이다. 여름을
대비하기 위해 러시아의 추운 겨울이 무대가 되는 닥터 지바고를 읽으며 더위를 날리려는 피서를 기대하고 준비한 것을 이번에야 손에 쥔 것이다.
이의 음악도 좋다. “라라의 테마”로
명명된 음악을 경음악으로 다운받아 자주 듣는데 이도 늦게나마 읽기를 재촉하는 동력이 되었다.
여느 소설이든 대개 초반부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예전 <그리스인 조르바>도
그랬듯 도입부에서 읽는 진도가 조금 지체되기도 했다.
페이지마다 별 여백 없이 빽빽히 나열된 활자는 날 복종시켰다.
또 하나씩 등장하는 러시아 인명은 인내심을 시험하기도 했다. 인명
하나에도 별도 애칭이거나 줄임 이름(?)이 등장하여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지남 우리의 지바고-고군분투하는 유리의 일관된 일상이 급속도로 전개되면서 나는 <닥터 지바고>와 더불어 과거 격동기의 러시아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유럽이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전제정치가 종말을 맞는 계기가 된
반면 러시아에서는 1917년까지 국정운영의 대원칙으로 존재했으니 상대적으로 후진적 정치체제와 이에 따른
사회체제는 두 번에 걸친 유혈혁명과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공산주의 국가로서 소련이 탄생하고, 다시 러시아공화국에 이르도록 그 폐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었다.
1차 혁명과 1차 세계대전, 그리고 2차 혁명의 격동기에 우리의 <유리 안드레예비치>-“지바고”는 산전수전을 겪고 외형상 3번이나 여인을 맞이하고 각각 동거를 하게
되나 그의 가슴에 영원히 기억되는 여인은 <라리사 표도로브나>-“라라”이다.
지바고는 모스크바 갑부의 외아들이었으나 유산은 전혀 없고 도리어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지만 인척의 도움으로 의사로
성장하면서 인텔리겐차가 된다.
홀어머니 아래 라라는 어려운 환경이나 그 환경이 심지 단단한 여인으로 단련시켜 준다.
피난지 유라찐에서 장인을 포함한 가족을 부양하는 지바고에게 부딪히는 현실이 고달파서일까, 거기서 다시 조우하게 되는 라라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이중생활 하는
지바고에게 실망….
하지만 알고 보면 혁명으로 태동하는 불합리한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그만의 생활을 지키고자 하는 “지바고”이자 “빠스쩨르나끄”는 <톨스토이>를
지향한다고 보며, 이 점에서 박수를 친다.
(갑작스레 톨스토이를 나열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라라와의 재회에서 두 사람의 대화 알알이 “플라톤의 대화편 못잖은
깊은 의미가 담겨있었다”는 서술이나, “대개의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이 감정의 특별한 속성을 알아채지 못하고 경험하는 법이다. 그러나 마치 영원의 한 순간처럼 욕정이 그들의
불안한 인간적인 실존에 찾아 드는 순간순간이란 그들에게는 그들 자신과 삶에 대해 끝없이 새로운 발견을 하는 순간,
즉 계시의 순간들이었다”는 설명은 남녀간 사랑에 대한 정의치고는 있는 그대로의 표현이지만
그 전제로서 조건 없는, 온 몸과 마음으로 열려진 상태에서의 사랑이라야 한다.
마지막 헤어짐으로 라라를 보내고 나서 “…그는 어린 소년처럼 무릎을
꿇고 딱딱한 모서리에 가슴을 기대고는 이부자리에 머리를 파묻은 채 어린애처럼 훌쩍훌쩍 울었다….”는
마음을 충분히 안다.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하고, 종래 이별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린 저마다 이별에 무장해제당하곤 하지만 알고 보면 이별은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함인 것도 안다.
누구에게나 주관적인 사랑이 전개되고 언덕을 오를 때 웃는 것이 결코 웃는 것이 아니듯 절박한 것이며 영혼을 몰입하게
하는, 아! 나도 몰라라.
“혁명은 편협한 마음을 가진 광적인 행동가들, 자기 제어의 천재들에 의해 수행된다”는 말처럼 시민을 위한 혁명정신은
실종되고 이 혁명은 시간을 거슬러 혁명을 위한 혁명이 되고 일부의 영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빛 바랜 혁명의 광기이거나 이의 모방이자 아류가
판을 치는 현실이 당시 러시아에만 번진 현상은 아니다. 거창한 슬로건을 내세워 홍보에 집중하는 정치세력
치고 실로 민심을 돌보는 정권은 부재하는 대한민국의 지금. 편협한 사이비 혁명가들이 국민을 아래로 보고
그네들만의 리그를 향유하는 꼴이다.
말미에 소개되는 “유리 지바고의 시”는
그림의 떡이다.
빠스제르나끄가 시인으로 이름난 터에 원래는 멋진 서사, 서정적인 시였겠지만
번역으로 보는 그의 시는 전혀 끌리는 점이 없다. 무척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