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적, 그뒤를 밟으면
박정원 지음 / 문학수첩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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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각시집이라는 것. 생소했다, 나에겐 한참동안. 텍스트만 나열되어있는 시집과 책들이 나에게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런지 시 한편, 옆에 조각작품 사진 하나 그렇게 있는 것이 낯설기도 하고 감각적이기도 하고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고 그랬다.

이 시집은 '잠적, 그 뒤를 밟으면'이란 동일 제목을 갖고 있는 연작시들로 이루어져있다. 시집을 찬찬히 넘겨보면서, 나는 잠적이라는 의미에 한참동안 의문이 들었다.

종종 잠적하고 싶다, 그런 말을 하곤 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회의와 답답함을 느끼고 친했던 사람조차 귀찮은 대중, 배경으로 느껴질 때 진정한 나와 대면할 고독한 시간을 갖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그 사회에 부적응감을 느낄 때에는 한 걸음 물러서고 싶고, 열등감과 실패감을 느낄 때 누군가와도 만나고 싶지 않은, 혼자서 생각해야만 하는 그런 시간을 갖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잠적은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수동적인 행동의 결과일 뿐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관대하게 이 잠적이라는 행동을 바라보고 싶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란 항상 광장에서만 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세계가 없는 사람이란 다른 세계에서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녹아버리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 시집에서의 잠적이란 의미는 이런 보편적인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시에서 곧잘 나오는 소재가 사랑인 것을 보아도 작자는 잠적이란 의미를 사람의 마음 속 깊숙한 무언가를 상징이란 수법으로 다룬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기 내면에 잠적해 있는 그 무엇. 그것은 잠재되어있는 욕구일 수도 있고, 희망일 수도 있고, 추억일 수도 있고, 고귀한 사랑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일상에 부대껴 잊고 사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 잊음, 망각의 이면에 슬픈 모습으로 서 있는 그 잠적되어있는 것들. 잊고 있었어, 하며 탄식하며 그 잠적되어있던 것을 다시 대면할 때의 그 슬픔, 어이없음.

이 시집에 수록되어있는 그 많은 연작시들과 조각작품들이 독자에게 많이 다가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잠적이라는 의미를 다룬 이 시들과 자기 자신의 잠적에 대한 생각을 비교해보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시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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