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식이는 재수 없어 1 - 본격 어린이 개그 만화
이경석 지음 / 새만화책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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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덮으며 지울 수 없는 의문.  

"왜 을식이가 재수없는걸까?"  

표지를 보면 을식이가 정말 재수없는 애처럼 보이는데, 실은 을식이는 하나도 재수없지 않다.  

늘 사고는 단짝인 흥식이가 치고다니고 을식이는 흥식이 뒷수습하기에 여념이 없다.  

흥식이가 연상의 여인 때문에 괴로워할 때도, 개인기 연습 때문에 흥식이의 얼굴이 하루하루 삭아가는 모습을 볼 때도 차마 흥식이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흥식이를 걱정하고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 다닌다. 흥식이의 사각턱이 어깨를 짓눌어 괴로워도 흥식이가 상처받을까봐 말도 못하는 친구가 을식이다. 심지어 흥식이의 장래를 생각하며 (흥식이가 너무 안됐어서) 눈물까지 흘리는 친구가 을식이란 말이다.  

 그런데 왜왜 이 작품의 제목은 을식이가 재수없다는 거냔 말이다.  

 을식이는 제목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는 명실상부한 주인공인데도 맨날 흥식이 뒷수습하느라 뼈가빠져라 고생을 하고 있단 말이다. 주인공인데 주인공 취급도 받지 못하는 우리 을식이, 왜 재수까지 없다고 하느냔 말이다.  

 이경석 작가가 처음에는 을식이를 재수없는 애라고 그리고 싶었는데 그게 안된건지, 편집부의 취향이 너무 독특해서 을식이처럼 착한 애가 재수없다고 생각해서 제목을 그렇게 정한건지, 당최 왜 을식이가 재수없는 건지 출판사와 고래가 그랬어, 이경석 작가에게 꼭 답을 듣고 싶다. (아님 2권부터는 을식이가 정말 재수없게 나오려나?) 

 

좌우간 질문은 뒤로하고, 이 만화, 진짜 웃긴다. 본격 '어린이' 개그만화라는 문구의 '어린이'는 독자를 염두에 뒀다기 보다는 주인공이 '어린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달까. (<고래가 그랬어>를 구독하는 아이들에게 이 만화가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직접 설문이라도 해보고싶을 정도인데다가, 이 작품을 연재하기로 결정한 <고래가 그랬어> 편집부의 센스에 기립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 만화가 너무나 사랑스러운 것은 이경석 특유의 엽기성이 이렇게 귀엽게(!) 살아났다는 점도 있지만, 이 작품이 어린이 잡지에 연재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도 있다. '코딱지'와 '철봉' 에피소드는 정말이지 작가의 (더럽지만!) 사랑스러운 상상력과 표현력이 정점에 올라있는 작품인데, 어린이를 계몽의 대상이 아닌 놀이와 문화를 향유하는 주체로 대하고 있는 작가의 태도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튼, 이 만화는 여튼, 너무 재밌다)

 

좌우당간, 을식이의 단행본 출간을 환영한다! 2권에서도 만나자꾸나!  

 

*재규어와 이경석 작가의 전작인 <속주패왕전>을 발견하는 것도 소소한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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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말을 걸다 - 밥상에서 건져 올린 맛있는 인생찬가
권순이 지음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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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만 8년째 하고 있으면서도 변변한 음식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지만, 친구들이 집에 오는 날이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을 때 간혹 요리를 하곤 한다.

우리 엄마가 자주 하는 말로 "먹는 게 일"일 수도 있지만, 가끔 내가 만든 음식을 먹을 상대의 반응을 상상하거나 스스로를 위해 요리를 하고 있자면 어울리지도 않게 얼굴에 미소가 씩- 하고 떠오르곤 한다. 돈을 주고 사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주변에 넘쳐나게 많지만, 친구를 위해 나를 위해 굳이 음식을 만드는 것은 음식을 만드는 행위 자체가 감정과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그 자신의 유기체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꼭 해야만 하는 본능적인 몇몇 일 가운데 먹는 일 처럼 사회적이고 감정이 묻어나는 행위가 또 있을까.

<음식이 말을 걸다>의 저자인 권순이 선생님의 음식을 '읽'다 보면 그의 이야기와 감성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면서 조근조근 들려온다. 가르치는 학생들에 대한 그의 애정, 친구들과 가족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 삶과 인생을 받아들이는 그의 겸허한 태도. 게다가 그가 해주는 음식은 정말로 맛있을 것 같은 강한(!) 확신이 든다. 

그리고 나서는 나에게 음식을 해주었던 사람들과 내가 음식을 해주었던 사람들이 스쳐가면서 다시 한번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씩-하고 떠오른다. 얼마 전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말라깽이 친구 녀석에게 이 책에 나와 있는 음식 중 몇몇 것을 만들어 밥상을 차려 주고 싶다. 이 책의 저자처럼 능숙하게 음식을 잘할 자신은 없지만, 중요한 건 간이 아니라 나의 애정이라는 걸 알려주면 이해할 것이라고 (혼자) 우기면서.     

  

*유머와 위트까지 넘치는 일러스트 역시 너무나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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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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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크렌쇼 씨가 경찰관의 이름을 묻고 나서 명함을 보지 않으려고한 이유를 모르겠다. 알드린 씨에게 설명해 달라고 하고 싶지만, 알드린 씨도 갔다. 나는 왜 정상인인 알드린 씨가 크렌쇼 씨를 그런 식으로 따라가는지 모른다. 크렌쇼 씨를 무서워하는 걸까? 정상인들도 다른 사람들을 그런식으로 무서워할까? 만약 그렇다면, 정상이라서 좋은 점이 뭘까? 크렌쇼 씨는 치료를 받아서 정상이 되면, 다른 사람들과 더 쉽게 어울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크렌쇼 씨가 말한 '어울리다'의 의미가 궁금하다. 어쩌면 그는 모든 사람들이 알드린 씨처럼 자신을 따라 다니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를 따라다닌다면, 우리는 우리가 맡은 일을 다 하지 못할 것이다." 


자폐인인 주인공 루의 말이다.

고압적인 보스 크렌쇼와, 자신의 보스이자 크랜쇼의 부하직원인 알드린의 모습을 보고 생각한 말. 


 

정상이라서 좋은 건 그냥 묻어서 살 수 있다는 것 뿐이라오, 루.


어차피 사람들은 다 적절한 가면을 쓰고 상호작용을 하고, 일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힘들게 유지되고 있어요.

'적절하게' 어울린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죠.

'정상인'들은 당신만큼 정교하고 견고한 자기만의 세계가 없고, 조금 더 유들유들해서 남들과의 경계와 좀 더 잘 섞이는 것 뿐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정상인'들은 당신보다 사회에 좀 더 쉽게 '어울리는' 것 뿐이죠.

사회와 타인, 외부세계의 본질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배워온 것 뿐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소통을 하는 것은 '정상인'들 사이에서도 아주 드문 일에 속하죠.

당신은, 훨씬 견고하고 완전한 당신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전혀 합리적이지 않고 멋대로 구는 '정상인'들의 사회를 잘 보고 있나봐요.

당신이 꼭 사회학자 같아요.

사람들, 참 찌질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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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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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읽으면서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책들이 있는데,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가 그런 책들 중 하나다. 자신의 무식함과 무관심이 자책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동'의 역사에 징그러울 정도로 무식한 스스로가 부끄럽고,  되풀이 되는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쟁 상황에 대한 불쾌감을 주변인들에게 배설한다던지, 반전집회에서 놀다오는 것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소화가 잘 안된다. 

그래도 그들의 역사, 그들의 모습을 마주하고 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위안을 갖고 금방 스스로를 회복시키곤 한다.

<팔레스타인>은 따지고 보면 <십자군 이야기>를 통해서 읽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 친구에게 <십자군 이야기>를 권해줬더니 이 친구가 그것을 읽고는 <십자군 이야기>에서 소개해 주고 있는 많은 책 가운데 <팔레스타인>을 덜컥 사버리고는, 다시 나에게 권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게 된 것이 몇년 전이었고, 올해 생일에 다른 친구에게 졸라 이 책을 선물로 받아 올해 초에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었고, 며칠전 또 다른 나의 친구에게 이 책을 생일 선물로 사주었다.

친구에게 건네기 전에 다시 한번 이 책을 봤는데, 버스 안에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울컥하면서 눈에 눈물이 고이고, 버스에서 내릴 즈음에는 어딘가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이렇게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팔레스타인>의 저자인 조 사코의 태도는 꽤 냉정하다.

조 사코는 가자지구에서의 불안하고 진절머리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고, 어딜가나 마주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영웅담(?)을 일일이 기록하지도 않는다. 그의 기록에는 끝도 없이 설탕을 차에 부어 넣는 그들의 모습, 한 두명 쯤 이스라엘 군의 총에 맞아 죽은 가족이 있는 것이 당연한 그들의 모습, 통금 시간이 존재하고 언제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그곳에서 생일이 되면 몸에 땀이 비오듯 흐르게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 시위를 하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젊은이들의 모습,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생계수단이자 자식과도 같은 올리브 나무를 이스라엘군대가 무참히 베어가는 모습이 있다.

비가 오면 언제나 구정물이 넘치는 거리에서, 통제와 감금과 폭력의 공포가 '일상'이 되어 '여전히'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곳의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조 사코는 거칠게 말하면 개입하지 않는다. 그곳을, 그 사람들을 기록한다.   

바로 그의 그런 태도가 그들의 모습을 바로 보게 한다. 이런 화면들 속에서 나의 입장, 나의 처지에서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마주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당장 내가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킬수도 없고, 그럴 일도 없을 것이고, 그렇게 할 수도 없겠지만, 이제는 그들과 마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소시민적 만족은 느낀다. 대상에 대한 관심, 대상을 마주보는 것에서 모든 사건은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덧붙이자면 만화라는 매체를 저널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조 사코의 능력은 여전히 대단하게 느껴진다. 성의있는 번역과 김수박을 활용한 편집자의 센스, 그리고 에드워드 사이드와 박홍규, 최진영씨의 글 역시 읽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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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3 - 애장판, 완결
유시진 지음 / 시공사(만화)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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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시진의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존재간의 관계와 소통'이다.

학교라는 조직 안에 있는 고등학생들이 그 주인공이건(쿨핫), 신화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건(마니, 신명기) 그의 주제에 훨씬 밀접하게 느껴지는 소소한 일상의 공간이 배경이건(그린빌에서 만나요) 늘 그렇다. 

언뜻 유시진의 작품세계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내면에 매몰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만약 그런 방식이었다면 분명 나는 그의 '자의식 과잉'에 진절머리를 흔들며 그의 작품을 꼴사나운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지만, 인간 심리의 본성이나 치부를 섬뜩하게 마주하는 방식은 아닐뿐더러(그런 작품이라면 자의식 과잉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그런 자아의 끝없는 침잠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시진의 작품이 늘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먹먹한 기분을 갖게 하는 것은 그의 작품이 늘 자아와 외부와의 관계, 소통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루는 화법이 인물들의 내면에 섬세하게 집중하는 방식인 것으로 읽힌다.

<폐쇄자>를 시작으로 유시진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는 그 범위가 작아지고, 몇몇 관계에 집중되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내면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주인공들의 내면에 더욱 집중하는 장면들은 오히려 주인공이 맺는  외부와의 관계를 더 극명하게 드러내고, 이러한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주인공이 성장하거나 변화해가는 부분을 더 극적으로 드러나게 해준다(전작인 <그린빌에서 만나요>에서 이런 과정이 아주 섬세하게 그려져있다). 이전에 그의 작품들에서 잘 드러났던 남성성(혹은 마쵸성?)과 집단 혹은 조직이 발현하는 폭력에 대한 반감들이 드러나는 방식도 모두 주인공들이 맺는 사람들의 관계와 소통방식, 외부의 상황을 인식하는데에 있다.

<온>을 다 읽고, 마치 이 작품이 전작들인 <그린빌에서 만나요>와 <폐쇄자>를 섞어놓은 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실은 그 점이 조금 아쉽다. 덜 인상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린빌에서 만나요>는 한 평범하고 살짝 예민한 10대 소년의 성장만화이고, <폐쇄자>는 실은 좀 극적인 연애-썩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지만-이야기다. 전작들이 줬던 강한 인상이 <온>에서는 조금 덜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온>은  여전히 관계에 민감한 인물들의 예민한 감성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탁월하고, 현대와 환타지의 세계를 오가는 탄탄한 구성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나는 유시진의 작품을 '로맨틱'하고 '신파적'이라고 생각한다. 관조적이고 (지적이며) 담담한, 그리고 세련된 인상을 주는 그의 작품에 대해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런 인상이 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것인지 나는 늘 유시진의 작품을 접할때마다 뭔가 먹먹하고 괜시리 안타까운, 그런 기분을 경험한다. <온> 역시도.

여전히 유시진은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한다. 그가 조금만 더 독자를 생각하고(!) 안정적인 지면이 확보되어 빠른 시간 안에 그의 다음작품을 접할수 있으면 한다. (사실 이제 유시진씨의 단행본을 목빠지게 기다리는 미련한(?) 행위는 포기한지 오래다. 이것은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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