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퀸 : 적혈의 여왕 1 레드 퀸
빅토리아 애비야드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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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타. 지배계급인 은혈과 피지배계급인 적혈이 마치 지붕과 기둥처럼 떠받들여지고, 떠받들며 살아가는 곳. 다른 것도 아닌 오직 피의 색만으로 날 때부터의 사회 계 급이 정해지고, 일평생 그러한 ‘삶의 진리’를 따라야 하는 세계다.


메어는 적혈인들의 마을인 스틸츠에서 가족과 살아가는 평범한 십대 소녀로, 몸에 붉은 색의 피가 흐르는 적혈이고, 먹고 살기는 힘들며, 위에서 군림하는 은혈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다. 일정 나이가 되면 전쟁터로 보내져야만 하는 룰대로, 그녀의 소중한 오빠 셋은 모두가 저마다의 목숨을 내걸고 기약없는 지옥에서의 나날을 보내 는 중이다. 전쟁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돌아오신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와 어머니, 뛰어난 손재주로 그나마 '쓸모있는 적혈'로 여겨져 생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는  동생 지사. 이젠 그들이 메어에게 남은 전부와도 같다.


가족 외에 메어에게 남는 이가 있다면 바로 오랜 친구 킬런이다. 가족만큼이나 소중하고 지켜주고 싶은 존재. 킬런은 어부의 제자로 제 가치를 증명한 덕분에 징병에서  제외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를 잃게 되어 전쟁터로 끌려갈 위기에 처한다.


그녀의 특기는 도망칠 때 유리한 빠른 발놀림과 소매치기 기술. 자신과 킬런이 징병에서 벗어나 도망갈 수 있게끔 자금을 모으기로 결심한 메어는 동생 지사에게 도움을 청하고, 은혈들이 가득한 도시에서 그 계획을 실천하고자 한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전개로 위기에 처하게 되고, 그로 인해 지사는 가장 귀중한 자신의 손을 잃게 되는 비극을 겪는다.


지사의 사고와 비극에 대한 모든 책임감을 느끼는 메어. 어리석은 자신을 책망하며 정처없이 헤매던 그녀 앞에 새로운 인물, 칼이 나타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의 도움으로 왕궁 일을 돕게 되지만, 왕세자의 비를 뽑는 행사 '퀸스트라이얼'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를 겪으며 자신도 모르던 제 안의 능력을 깨닫는다.


불가능한 일이고 허락되지도 않은 일이다. 하우스-가문마다 주어진 각기각색의 초능력은 오직 고귀한 은혈들에게만 주어진 특권과도 같은 것이어서, 별 것 아닌 적혈 소녀가 같은 힘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큰 문제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은혈과 적혈의 계급을 나누고, 오랜 시간 동안 그 계급이 유지되도록 가능케 한 힘이 바로 은혈들만의 초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적혈들의 희망을 빼앗고 나머지 은혈들의 의심을 누르기 위해 왕과 왕비는 둘째 왕자인 메이븐과 메어의 결혼을 약속하고, 그녀가 자신의 출신성분을 모두 숨긴 채 사라진 가문의 살아남은 은혈 생존자 '메리어나 타이타노스'로 연기하며 살아가도록 압박한다.


늑대굴에 남겨진 양이 되어 매순간 감시와 압박을 받으며 살아가는 메어. 궁중암투와 의심, 배신과 배반이 판치는 그곳에서의 삶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그녀를  숨막히고 지치게 만든다. 그런 생활에 그나마 숨통 틔우는 존재는 칼(왕세자)와 메이븐(왕자). 다행히도 그녀에게 적개심 없이 대해주는 이들이 있어 버틸 힘이 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삶과 운명은 뜻대로만 흐르지 않아 위기가 잇따른다.


진홍의 군대. 은혈들의 부조리한 군림과 그들의 적혈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탄생한 모임. 은혈로서의 삶을 겪을수록 그들에 대한 저항심 과 적개심이 더해짐을 느끼던 메어는, 때마침 알게 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계기로 진홍의 군대 일원이 된다. 자신의 목숨과 안위를 걸고 이중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더 큰 그림과 미래를 그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데...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되는 여러 번역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레드 퀸' 시리즈 역시 놀라운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25세인 저자의 첫 작품, 출간과 동시에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 100만부 이상의 판매고와 38개국에 팔린 판권 등. 일개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도 엄청난 기록과 인기를 헐리우드의 전문가들이 놓칠 리가 없다. 때문에 영화화까지 확정되었단다.


위에 소개한 줄거리 내용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사실 '레드 퀸-적혈의 여왕'(이하 레드 퀸)의 소재가 아주 신선하거나 기존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은 아니다. 동시대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 같은 분야의 여러 작품에서도 자주 쓰이는 것들이라 익숙하기까지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중 도드라지게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어찌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재미와 매력이 충분하고 독자의 집중력을 끌어당기는 힘이 대단한, 이야기로서의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엔 사건과 갈등이 줄을 잇고 수많은 캐릭터들의 처절한 분투가 있다. 하지만 결코 부담스럽거나 어렵지 않아서, 누구나 쉽고 즐겁게 읽을 수 있을 법한 점이 최대 장점이다. 게다가 적당한 휘발성과 무게감이 동시에 갖춰져서,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에도 알맞고, 그저 여가와 독서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한 대상으로도 훌륭하다.


레드 퀸을 읽고 있노라면 제법 많은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사이에서 갈등하며 많은 질타를 받아야 했던 트와일라잇의 벨라가 떠오르기도 하고, 계급사회의 부조리함을 부수고 신세계를 정립하기 위한 도전과 용기가 빛났던 레드라이징과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 레드 퀸에 등장하는 은혈 귀족(하우스)들마다의 각기 다른 초능력들은 여태 접해왔던 수많은 만화와 이야기와 영화를 떠올리기에 어렵지 않다. 아무래도 많은 작품들 속에서 다뤄졌던 비슷한 소재 때문이리라. 하지만 작가 빅토리아 애비야드는 분명히 고민했고, 열심히 표현한 것 같다. 읽어본 독자로서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레드 퀸과 그 작품들이 예상하기 쉽게 닮은 꼴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 같은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조리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다양한 레시피가 나오기 마련이다. 이 이야기는 재밌고, 제 색을 잘 지켜냈다.


실수하는 미성숙한 소녀. 레드 퀸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 중 하나가 바로 주인공 '메어'다.

자신과 더불어 소중한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같은 계급에 속한 이들(적혈)의 더 나은 삶과 미래를 위해 변화를 꿈꾸는 그녀는, 매번 벽에 부딪치고 거대한 힘 앞에 떨 면서도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다. 목숨을 내놓아야 할 지도 모르고, 이번이 끝일 수도 있지만 굴복하지 않으리라- 하는 그 용기가 어디서 나는지. 새삼 기특하면서도 멋진 캐릭터여서 읽는 내내 그 누구보다도 매력적이었고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백마 탄 기사와 같은 히어로가 나타나 신세계로 데려가주는 식의 이야기는 더 이상 큰 의미도, 흥미도 끌지 못 하는 편이다. 하염없이 기다리기보다 능동적 으로 이야기 중심에 뛰어드는 여자주인공이라니. 헝거게임과 같은 여러 소설에서도 비슷한 용기를 가진 캐릭터들이 존재하고 하나 둘 새로이 등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이 주류는 아니다. 때문에 메어는 여전히 가치있고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로맨스 판타지물답게 비현실적인 배경과 요소들 위로 캐릭터들 간의 떨림과 사랑이 있다. 누군가는 판타지 성향이 섞인 로맨스물로, 누군가는 로맨스를 끼얹은 판타지 물로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단 '성장물'로서의 이야기와 주는 메시지가 더 강하다고 평하고 싶다. (앞으로 출간될 시리즈의 2,3권에서의 전개를 접하고 나면 달라 질 수도 있겠지만 1권까지만의 내용으로는 '실수하고 여전히 미성숙한 소녀'의 성장 과정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은 생각이다)

 

 
누구든 누구라도 배신할 수 있다.
메어의 성장에 있어 가장 의미심장하고 중심적인 문장이 아닐까.
치열한 궁중암투와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조력자의 배신까지, 메어는 매번 벽에 부딪치고 열망했던 꿈이 조각나는 과정을 수없이 거친다. 심지어 타인이 아닌 '스스로의 믿음'에서조차 배신 아닌 배신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동안 자신이 저항하고 투쟁하게끔 만들었던 세계관과 믿음들이 깨지는 과정을 통해서다.
옳다고 판단해 선택했던 일이 불행을 초래하고, 기회라 여겨 뛰어든 일이 발목을 붙잡는다. 또한 자신이 속한 곳이 세상의 가장 밑바닥이며 스틸츠에서의 삶이 가장 고달플 것이라 생각했지만, 눈을 뜨고 나아갈수록 더 많을 것을 보며 깨닫는다. 스틸츠보다 더한, 빛과 하늘을 볼 수조차 없는 지옥같은 도시가 존재하고, 스틸츠의 사람들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지옥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많은 갈등과 사고를 겪었음에도 메어는 여전히 미성숙하고 실수를 반복한다. 너무나도 용감하고 기특해서 잊고 있었던 점, 그녀가 겨우 십대 소녀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부분이다. 쉽게 굴복하지 않고, 더 큰 내일을 위해 목숨 내놓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 미래를 위해 가슴 떨리는 애정을 애써 밀어낼 줄도 알지만 '단번에 모든 걸 배울 수는 없고 하룻밤만에 어른이 될 수도 없다.'.


성인인 나도 이야기를 읽으며 메어와 동질감을 느꼈고, 그녀가 처한 위기와 사건 속에서 비슷한 착오와 실수를 경험했다. 몸이 자란다고 해서 마음까지 자라는 게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 나뿐만 아니라 세계의 무수히 많은 다른 독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본인들의 나이와 겪어온 세대에 국한 되지 않고 모두가 메어이며, 모두가 미완성이고, 모두가 성장할 여지가 있는 존재라는 걸. 이토록 레드 퀸을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시대에는 노르타와 같은 계급이 없다. 게다가 모두가 붉은 피를 가진, 동일한 '적혈'의 사람들이다. 이토록 다른데 왜 그렇게 메어의 이야기가 와 닿았을까 생각해본다.
결국엔 현실과 소설 속 노르타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거다. 직접적인 신분제도는 없지만 누구나 살아감에 있어 느끼는 현실의 벽이 있을 것이고, 책에서는 그 벽을 '적혈'과 '은혈'로 나뉘는 배경 장치를 통해 명확히 했을 뿐이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에 대해 고민해본다. 상대가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세상인가, 유리벽과 유리천 장으로 가득한 세상인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실로 정말 오랜만에 새벽 늦게까지 읽은 책이 바로 '레드 퀸'이다. 워낙에 읽는 속도가 느린 달팽이 독자인지라 책 한권 돌파하기에도 며칠이 걸리는 타입인데, 이 책은 손에 꼽힐 정도로 몰입해 빠르게 읽었던 기억. 몰입해 빠져드는 독서의 즐거움을 제대로 맛 본 지가 언제였더라. 다 떠나 그 맛을 다시금 경험하게 해준 역할만으로도  레드 퀸에게 박수를.


누군가는 장미를 가장 좋아하고 누군가는 튤립을 제일 사랑한다. 그렇지만 장미와 튤립 둘 모두 저마다의 가치와 미를 가진 아름다운 존재이지 않나.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최고가 될 수도, 누군가에겐 심드렁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쪼록 많은 독자와의 만남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재미있는  이야기이고, 나름의 가치가 분명한 책이니까. 2권 번역본은 언제쯤 나올까 조급한 기다림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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