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와 뼈의 딸 1 -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4-1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4
레이니 테일러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파도처럼 물결치는 파란 머리카락을 지닌 17세 소녀 카루는 평범한 학생 생활과 키메라(괴물)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이중생활 중이다.

빼어난 재능을 가진 카루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환상적이고 독특한 생김새의 키메라-다정한 성품의 뱀 여인 이사, 역시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앵무새 부리와 인간의 눈을 한 야사리, 주체하기 힘든 긴 기린 목을 가진 트위가, '위시멍거'로 불리우며 소원 거래를 하는 거대의 양뿔을 지닌 브림스톤이다. 그들은 카루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를 거두어 길러준 가족들로, 분명히 실존하지만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존재들이다.

동물들의 이빨과 사람들의 치아를 두고 거래를 하는 브림스톤의 부름을 받아 거래에 나선 카루는 포털을 통해 모로코 마라케시로 향하고, 그곳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듯한 위협감을 느낀다. 몸을 사리던 와중에 드디어 마주한 범인은 다름 아닌 천사 아키바. 왠지 모를 끌림으로 그녀의 뒤를 쫓던 아키바는 카루의 손바닥에 새겨진 눈 모양의 함사스 문신을 보고 공격하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적군인 키메라의 브림스톤과 관련된 자임을 알아채고 그랬던 것.

치열하게 다툼을 벌이다 큰 상처를 얻고 겨우 도망친 카루는 그날밤, 브림스톤과의 약속을 어기고 절대 열어보면 안된다는 금단의 문을 열고 만다. 이를 알게 된 브림스톤은 격노해 약속을 어긴 죄로 만신창이인 카루를 인간세계로 쫓아내버린다. 다친 몸과 버려졌다는 비참함으로 절망에 빠진 그녀는 다시금 키메라 가족과 만날 날을 소망하지만, 얼마 못가 그 꿈은 산산조각이 난다. 천사들이 미리 표시해두었던 포털들을 파괴하고 불태워 영영 그들과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포털 파괴 전 브림스톤이 간신히 보내온 메세지(위시본)은 분명 그가 여전히 그녀를 아끼고 있다는 뜻이었기에 더 큰 슬픔을 주었고,마침내 카루는 복수를 결심한다. 

하지만 다시 만나게 된 아키바와 카루는 서로가 분명한 적군이자 원수임을 알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껴 혼란에 빠진다. 자신이 '무엇'인지 궁금한 카루와 키메라인 그녀를 두고 마음이 흔들리는 아키바. 둘 사이에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과 끊임없이 흐르는 이 감정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둘 사이에 결코 끊어지지 않을, 인연의 끈이 있음이 분명했다. 

 

 

(이 내용이 중후반까지의 이야기다. 뒤에 그 '인연의 끈'이 무엇인지 설명되지만 1권의 중요 포인트 중 하나기 때문에 줄이기로... 직접 읽을 때의 재미가 조금 반감될 거 같아서.)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세계적 열풍과 대단한 성공 이후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온 비슷한 느낌의 판타지 로맨스형 YA소설들 때문일까. 사실 독자로서 이 이야기의 소재가 아주 신선한 편은 아니었다. 인간 또는 뱀파이어, 늑대인간, 추락천사, 불사자 등등. 다른 종족 간의 비극적이고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따른 기쁨과 슬픔이 그 많은 책들의 주제였으니 어찌 익숙해지지 않을 수 있겠나. 게다가 원수간의 사랑에선 '로미오와 줄리엣'이, 각종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조합으로 이뤄진 키메라의 외모와 음울하고도 신비로운 분위기는 영화 '판의 미로'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릴로지의 서막을 연 이 책이 꽤 흥미롭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펜을 쥐는 이가 누군가에 따라 낙서 또는 작품이 나오고, 같은 재료를 두고도 어떤 이가 조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의 음식이 나오는 법이다. 저자인 레이니 테일러는 쉽게 수렁에 빠질 법한 익숙한 재료를 가지고도 기존의 것들과는 좀 더 색다른 맛을 내는 완성품을 내놓았다.

 

 

그 색다른 맛이자 독자로서 마음에 들었던 점들을 몇 가지 꼽자면.

일단은 여주인공이 로맨스물에 흔히 등장하는 '공주형' 캐릭터가 아니었다는 거다. 유리같이 연약하고 누군가 보호해줘야만 하는 판에 박힌 이미지 대신, 카루는 결단있게 움직일 줄 아는 소녀다. 거침없이 뛰어들어 스스로 쟁취해야 함을 아는 캐릭터는 생각보다 더 매력적이다. 때문에 캐릭터 성격답게 로맨스가 차지하는 비율 만큼이나 카루의 성장담 또한 적지 않게 다뤄지고 있는데, 로맨스로 인한 주인공의 성장이라기 보다는 주인공이 나아감으로서 사랑 또한 깨닫는 편에 가깝다.

또 하나는, 이야기가 남녀 주인공의 애달픈 사랑에만 국한되어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 그저 '거들어주고 동조해주는' 역할로 소모되기 쉬운 조연의 캐릭터들 모두 각자의 뛰어난 매력을 지니고 있어 극에서 살아 숨쉬는데다, 인간계와 다른 세계를 오가며 전개되는 이야기는 그 스케일이 작지 않은 편이다. 때문에 특정 인물 위주의 전개나, 한 가지 주제만을 심도있게 다를 때에 생길 수 있는 단점인 '더 이상 흥미롭지 않고 질리는'현상이 보다 덜하다.

 

 

프라하를 배경으로 파란색 필터를 낀 채 세상을 보는 듯한 분위를 주는 이야기는 잔잔히 흐르는 초중반을 지나서야 제 힘을 발휘한다. 뒤로 갈수록 흡입력이 높아지는 편이어서 개인에 따라 처음엔 지루하다 느낄 수도 있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

허나, 촘촘하게 세워진 설정들과 세심한 감정 표현의 묘사가 뒤로 갈수록 내용에 몰입할 수 있게끔 큰 도움을 준다. 이 점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쓰인 부분은 남녀 주인공 사이의 '인연의 끈'이 무엇인지 설명되는 순간. 천사인 아키바와 키메라의 심부름꾼인 인간 소녀 카루가 드디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을 인정하며 다가서는 부분이다. 그 외에 주조연들이 감정을 주고 받는 순간 역시 마찬가지.



"때론 기쁨보다 고통의 힘이 더 강렬하다는 것.

우주를 통해 무언가 받을 때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소원빌기(마법)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누군가의 고통이 필히 재료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

소원과 같은 마법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건 결국 희망이라는 것.

그 희망이란 건 상징적인 물건을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니라,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언제 어디서고 존재하며 힘을 발한다는 것."

 

 

이야기 속에서 카루가 브림스톤의 가르침과 갖은 경험들을 통해 마침내 깨닫는 내용들이다. 재밌게도 판타지가 아닌 책 밖의 세상, 우리의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이야기들 아닌가.뻔하고 교과서적인 면이 없잖아 있지만 이게 바로 책 읽기의 묘미이지 않을까 싶다. 아는 내용을 두번이고 세번이고 다시금 스스로에게 일깨우는 것.

히트작으로 팬 베이스가 두터운 이 시리즈는 총 3권으로 영화화 작업 중이란다. 좋은 원작에 비해 실망스러운 영화가 적지 않은 편인데 아무쪼록 무사히 잘 나와 읽는 재미만큼이나 보는 재미 또한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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