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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ㅣ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그 사이, 나는 진정으로 내가 원하던 '광장'을 찾았는가. 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
며 다시 최인훈의 '광장'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던 지난 며칠동안, 이젠 기억의 저편으
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청춘의 어두운 '밀실'에 틀어박혀 여전히 한 마리 뱀처럼 똬리 틀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 존재의 존엄성을 존중받으며 자유롭고 평화
롭게 어울려 살 수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찼던 청춘 시절에 내가 추
구했던 '광장'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광장'을 열망하던 나의 열정은 너무도 빨리 얼어붙어 어느 순간인가부터 지독한
냉소주의자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얼어붙기 시작한 이유가 대학 시절, 군부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신념이 한낱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뿐이라는 패배감 때문이었는지, 첫사랑의 실
패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 이젠 기억 나지 않지만, 너무도
쉽게 냉소주의자로 돌변해 '밀실'로 도망쳐버린 근본 이유는 뭐니뭐니 해도 '인간'이란 존재
에 대한 불신이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명준으로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다. 소설의 시점은 전지적
작가 시점인데 주로 이명준의 입장에서 서술되고 있다. 소설의 배경은 1945년 8.15해방 직후
부터 1953년 6.25 전쟁이 끝 난 바로 직후까지의 남한과 북한인데, 이 시간들은 모두 과거
회상 부분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현재의 배경은? 포로 송환이 끝나고 중립국을 택한 이명준
이 타고 있는 인도로 가는 배 '타고르호' 안이다.
소설의 구성이 역순행적이다 보니 이 소설의 줄거리 역시 자연스럽게 외화와 내화로 나뉘
게 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핵심이 되는 이야기는 모두 내화에 담겨있다고 보아야 할 것
이다. 외화는 그저 내화가 원인이 되어 나타난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내화의 줄거
리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즉 주제를 파악하는 열쇠가 되리
라고 본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남한-
1945년 8.15 해방이 되면서 이명준의 아버지는 열렬한 공산주의자인 박헌영을 따라 월북을
하고 남한에 단 둘이 남겨졌던 어머니마저 병으로 죽고 만다. 그 이후부터 명준은 아버지
친구인 성공한 은행 사업가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된다. 아버지 친구의 집은 전형적인
부르주아의 가정으로서 명준과 같은 나이 또래인 영미와 태식은 집에서 자주 파티를 하는
데, 명준은 그런 향락적인 생활에 내심으로 염증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나타낼 수 없어 몇 번 같이 어울렸던 그 파티에서 우연희 '윤
애'라는 국문학도를 만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윤애의 집은 인천인데, 월북한 아
버지 때문에 두 차례에 걸쳐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명준은 윤애의 집에서 여름을 나
며 그녀와의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러던 중 우연히 북한으로 가는 밀항선을 타고 아버지를
찾아 혹은 자신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찾아 북한으로 떠나고 만다. 명준
이 북한으로 떠난 데는, 사랑이란 이름으로도 자신의 전부를 내맡기지 않는 윤애에 대한 배
신감과 원망도 그 원인이 있었다.
-북한-
자신이 찾는 '광장'이라 믿었던 북한에도 진정한 '광장'은 없었다.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
해 불타오르는 위대한 혁명가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버지마저도 전형적인 가부장제
사회의 남편이자 아버지의 모습, 그 이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북한 사회는 명령만이 존재하
는 눈곱만큼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는 그런 폐쇄적인 사회였다.
북한의 사회에도 염증을 느낀 명준은 월북 이후 하고 있던 기자 생활을 접고 공사 현장의
인부로 자원했다가 다리 부상을 입었는데, 부상을 입고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은혜'라는 발
레리나를 만나 다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은혜는 윤애와 달리 명준과의 사랑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듯이 보였다. 그런 은혜에게 명
준은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위해 모스크바 공연을 포기해 달라고 부탁한다. 처음엔 명준의
부탁을 부담스러워하던 은혜가 나중엔 눈물을 흘리며 명준을 위해 기꺼이 모스크바 공연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한다. 명준은 은혜를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방편의 약속이
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다음 날 신문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명준은 또 한 번 사랑에 배신감
을 느끼고 얼마 후 터진 6.25 전쟁에 참전한다.
북한군 장교가 되어 남쪽으로 쳐들어 간 명준은 남한에서 자신을 돌보아 주었던 아버지 친
구의 아들인 태식을 처형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리고 그의 첫사랑인 윤애가 태식의 아내가
되어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태식을 죽이고 윤애를 겁간하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하지 못
하고 결국은 둘 다 풀어주고 만다.
이 글의 시작부분에서 이미 밝혔듯이 나는 아직도 나만의 광장을 찾지 못 했다. 너무 오랫
동안 얼어있었기에 해동 이후에도 열정의 불씨가 다시 타올라줄지 겁이 난다. 어쩌면 소설
속의 이명준은 바다에 몸을 던짐으로써 열정과 냉정의 그 팽팽한 줄다리기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찾아야 할 '광장'이 '너와나' 단 둘만의 밀실에 가까운 그것이 될지, '가족'이라는 단
란하고 오붓한 그것이 될지, 종교라는 혹은 문학이라는 혹은 사회 개혁이라는 이름의 그것
이 될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 글을 맺는 지금 이 순간 이젠 정말 나만의 '광장'을 찾아야 한
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