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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
무라카미 류 지음, 권남희 옮김 / 이가서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너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
형식적인 얘기만 주고 받는 친구들만 있을 뿐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친구는 없는 29살의 주인공, 그는 서점 점원으로 여태껏 연애다운 연애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그런 남자다. 그러던 그에게 서점에서 점원과 손님으로 알게 된 '미키'라는 여자와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카드, 앞면엔 빨갛게 칠한 여자 발가락에 휘감겨 있는 도마뱀 그림의 마크와 뒷면엔 자기띠가 들어가 있는 카드로 MASK CLUB이라는 글씨와 불의 노예라는 문구가 있었다. 자기 앞에서는 한없이 총명하고 온화한 여자인 미키가 여태껏 한번도 본 적 없는 마크가 찍혀있는 이 기묘한 카드를 갖고 있는 것에 대해 큰 충격과 함께 호기심이 들고, 얼마 후 그는 미키를 미행해 어느 낯선 맨션에 들어갔다가 그 곳에서 살해를 당하고 만다. 그 후,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디 작은 벌레가 되어 그 맨션을 떠돌며 여자친구인 미키와 그녀의 친구들이 그곳에서 SM행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살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녀들에게 주인공보다 먼저 살해당한 사람 중 한명인 '데츠오'를 알게 된다. 주인공은 데츠오의 도움을 받으며 그녀들 중 한명인 '사라'의 몸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녀의 몸 속을 다니며 성장과정 등 그녀의 머리 속에 있는 기억들과 함께 서서히 SM클럽 그녀들의 과거를 알아간다. 그녀들은 어릴 적 아버지의 부재 또는 친척 혹은 계부의 성폭행 등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남자를 혐오하거나 오히려 성에 집착하는 증세를 보이며, 어릴 적 친구들 7명이 성인이 되어 우연히 만나 SM클럽을 결성하게 된 것이다.
주인공과 데츠오는 말을 하지 않고 생각만으로도 전파로 대화가 가능한데, 데츠오는 그것이 스스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닌 SM클럽 그녀들이 보내는 신호를 그저 번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그녀들이 벌레가 된 둘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두려워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말도 안 된다며 그렇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확신하며 무시하면서 책을 계속 읽어나갔다. 하지만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책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사라는 주인공이 벌레가 되어 자신의 몸 속에 들어와 자신의 기억들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도, 벌레가 된 그의 생전 이름을 부르면 벌레가 된 그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 조차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 그녀는 한마디를 하며 이 책은 끝을 맺는다. "어이, 콘도, 내 목소리 들리냐. 꺼져라."
이 책은 이미 죽은 주인공의 시점으로 시작해 중간부터 산 사람인 '사라'의 시점으로 옮겨 쓰여졌으며, SM이라는 편치만은 않은 소재로 쓰여졌다. 하지만 야하다 혹은 거북하다라는 느낌이 아닌 그녀들의 아픈 과거에 겪었던 일로 생긴 성적 트라우마로 인해 이렇게 변하게 된 점에 대해 같은 여자로서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