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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태평양 전쟁 : 광기와 오만 ㅣ 역사 딥 다이브 2
김휘찬 지음 / 한언출판사 / 2025년 10월
평점 :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든 생각은 “역사책이 이렇게까지 몰입감을 줄 수 있구나”였다. 솔직히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면 머릿속에 ‘진주만 기습’이나 ‘히로시마 원폭’ 정도만 어렴풋이 떠올랐을 뿐, 복잡한 해전 이름이나 수많은 지휘관들의 얼굴은 늘 낯설고 어렵게 다가왔다. 그런데 이 책은 달랐다. 저자는 단순한 전투 기록을 나열하는 대신, 전쟁의 순간을 “현장”으로 데려간다.
진주만 기습 전날 밤, 해군성 지하실에서 들려오는 긴장된 숨소리, 총리 관저에서 밤새 이어진 개전 논의, 미드웨이 해전 항공모함 함교 위의 혼란스러운 지휘 장면, 과달카날 정글 속에서 배고픔과 공포에 시달리던 병사들의 고통…. 책을 읽는 내내 마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듯했다. 전쟁의 포화와 소음이 귀에 들리고, 바닷바람 냄새와 함께 그날의 공기가 피부에 와닿는 듯했다.
그러나 이 책이 단순히 ‘생생한 전투 재현’에 머물렀다면 흔한 전쟁 서사로 끝났을 것이다. 진짜 놀라운 점은, 이 책이 그 모든 전투 장면 너머에서 “전쟁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는 데 있다.
일본 사회는 전후에 ‘도조 히데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망쳤다’는 단순한 신화를 만들었다. 천황은 책임에서 배제되고, 일본 국민은 피해자이자 희생자인 듯한 자기서사를 세웠다. 하지만 저자는 이 서사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천황이 전쟁을 막기 위해 오히려 도조를 총리에 앉혔다는 역설적인 상황, 그 뒤에서 드러나는 무능과 책임 회피의 구조, 그리고 도조조차 천황의 의중을 따르며 회피하려 했던 아이러니…. 읽는 내내 ‘천황은 무죄, 도조만 악역’이라는 신화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특히 1969년 도쿄 황거 앞에서 한 참전 군인이 천황을 향해 새총을 쏜 ‘새총 사건’을 책의 서두로 가져온 대목은 압권이었다. 짧은 해프닝으로 보일 수 있는 그 사건이, 사실은 전쟁 책임을 묻는 일본 내부의 절규였음을 드러내는 순간, 나는 섬뜩할 만큼 전율을 느꼈다.
이 책은 결국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질문’이다. 일본은 과거의 가해자였지만 동시에 오늘날 협력해야 할 이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저자는 “이해한다는 것은 용인한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똑바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일본과 관계를 맺는 출발점이라고 강조한다.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질문은 남는다. “그 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과거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다. 쉽지만 가볍지 않고, 재미있지만 깊이 있는 책. 나는 이 책을 단순히 전쟁사로 읽지 않았다. 그것은 역사 스토리텔링 전쟁사의 진수이자, 일본이라는 나라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 거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