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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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노인 대니얼과 십대 소녀 엘리자베스의 특별한 우정 이야기. 요양원에 있는 대니얼을 찾아가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엘리자베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처음 이웃으로 만나게 된 그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가까워지는지, 그들이 나눈 대화, 함께 한 일상, 서로의 생각, 예술, 거짓말, 태도에 대해서, 그들이 함께한 시간들이 책을 통해 오롯이 전해진다. 현재와 과거를 돌아가면서 이따금 또 다른 이들의 이상과 삶도 보여주면서.

 

이 책은 단순히 세대차를 넘는 이웃 간의 우정뿐만 아니라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와 일상을 통해 지나친 관료주의의 문제와 여성에 대한 차별, 난민 문제 등 여러 세상의 단편들을 아우르고 있다. 폴린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어딜 가나 존재하는, 실제로 그때는 지금보다 더 심했을 여성에 대한 차별과 모욕, 그리고 그들의 투쟁과 그로 인해 변화된 지금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환상처럼 느껴지는 대니얼의 꿈에서는 난민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가끔은 이런 우정을 꿈꿔본다. 나이와 성별과 상관없이 차이와 차별에 연연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하고 취향을 나누는 우정, 많은 것을 배우고 새로운 것을 깨닫고 틀린 것을 알고 잘못된 것들을 고쳐가는, 내가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우정을. 엘리자베스가 어릴 때 대니얼과 함께한 바가텔 게임처럼, 대니얼이 어떤 이야기의 첫 구절을 들려주면 그걸 듣고 떠오른 이야기를 엘리자베스가 말하고 그럼 내가 연이어 떠오르는 이야기를 말하는 그런 시간들을 함께하고 싶다.

 

많이 기대했던 소설이었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의 묘한 소설이었다. 페이지를 쉽게 넘기면서도 같은 문장을 몇 번 다시 곱씹기도 했고, 다시 앞 장으로 돌아가 뒷장의 이야기와 함께 읽어나가기도 했다. 다른 계절에 읽게 되는 그들의 계절 이야기. 봄에 읽은 가을 이야기를 지나 또 다른 계절에 읽게 될 어떤 계절의 이야기들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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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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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상실로부터 시작된 미스터리 형식의 소설. 상큼한 느낌의 제목과 표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다루는 중점적인 사건과 내용은 한없이 무겁고 어둡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로 대한민국이 한창 뜨거울 때, 한 여고생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사인은 두부손상. 수사과정에서 가해자로 지목되었지만 알리바이가 완벽한 사람 신정준과 무언가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목격자 한만우, 그리고 평소 피해자의 외모를 질투했었던 다른 여고생 윤태림이 의심을 받게 되지만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게 되고, 피해자가 버젓이 존재하는데도 가해자로 확정되는 사람은 없는 막막한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게 사건은 세상에서 잊힌다. 당시 그 일을 겪고 들은 당사자들만 제외하고서.

 

딸 해언이 죽고 나서 딸의 이름에 집착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 곁에서 자신의 존재마저 상실해버린 딸 다언. 죽은 자는 개명신청이 불가하다는 이유로 엄마는 딸 해언이 생전 소지했던 모든 물품의 이름을 혜은으로 바꾸고, 심지어 가계부에 적힌 이름 하나에도 집착하며 남아있는 딸의 이름을 모두 바꿔버린다. 그리고 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던 다언은 이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니의 얼굴을 따라 계속해서 성형을 시도하며 자신의 고통을 이어나간다.

 

무언가 끊어진 사람들, 생각지 못한 상실에 자신마저 잃어버린 사람들,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른 채 허전한 공백만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며 비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진범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마음을 다친 이들을 향한 먹먹한 슬픔이 함께 다가온다.

 

처음 레몬서평단을 신청했을 때 나는 신청이유에 이 책의 제목이 왜 레몬인지 이 책에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썼었다. 레모네이드, 레몬 과자, 베티번 씨, 상희가 직접 쓴 시 레몬과자를 파는 베티번 씨’. 이 얇은 가제본에서 나오는 레몬들은 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하나의 사건, 그리고 여러 화자들이 자신의 시선에서 말하는 이야기 레몬, 그 전체 이야기가 궁금하다.  

 

다언만이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쪽은 나일 수 있었다. 다언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데 반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 P63

내가 다언에 대해 아는 건 오직 한 가지, 한일 월드컵이 있던 그 해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이 결코 그녀에게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뿐이다. 끝없이 계속되리라는 사실뿐이다. 끔찍한 무엇을 멈출 수 없다는 것, 그 무엇이 끝없이 진행된다는 것, 그게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떤 무게일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P64

엄마가 엄마 스스로를 바꾸지 못해 언니의 이름을 바꾸려 했다면 나는 언니의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해 나 스스로를 바꾸기로 했다. 엄마가 말렸더라도 나는 감행했을 것이지만 엄마는 말리지 않았다. 말리기는커녕 부추긴 것이나 다름없다. 그토록 돈에 무서운 엄마가 선뜻 수술비를 대주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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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중록 1 아르테 오리지널 1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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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하루아침에 도망자의 신분이 된 여인 황재하. 가족들을 살해한 진범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은 황재하는 남장을 한 채 도망 다니다 몰래 숨어든 마차 안에서 황족 이서백을 만나게 된다. 황실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들을 해결해준다는 조건으로 그의 곁에 머물게 된 황재하는 여인이 아닌 환관 양숭고의 신분으로 사건의 단서들을 모으며 사건을 수사하게 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은 증언을 바탕으로 각 사건들이 모두 이어져있다는 것을, 실은 훨씬 오래전부터 이 일이 시작된 것임을 밝혀내게 된다.

 

처음에 이 책의 표지만 보았을 땐 어릴 때 종종 보았던 중국 황실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궁에 들어간 여인이 갖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총명하며 지혜로운 자신의 성정으로 고난을 이겨나간다는. 하지만 이 책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추리소설의 면모를 톡톡히 보여준다. 소재가 소재다보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많은 것들을 이어 생각하게 됐다. 그 속에 담긴 비밀, 과거의 일들, 범인의 정체 등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부분을 하나씩 밝혀내기도 했고, 그러면서 내가 생각한 추리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에선 대부분의 추리소설이 그렇듯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읽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문장을 만나는가 하면 황재하와 이서백의 대화를 읽으며 살짝 미소 짓기도 했고, 주자진의 엉뚱한 면모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두꺼운 분량의 소설이지만, 전혀 읽기에 부담스러운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첫 장을 펼쳐보면 끝까지 읽게 되는 흡입력 있는 소설이다 보니 남아있는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편으론 이 책의 끝부분을 빨리 읽어보고 싶다는 열망에 시달리기도 했다. 1권을 다 읽은 지금, 하나의 사건이 잘 마무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있다. 이서백이 들고 다니는 작은 물고기가 담긴 유리병과 그와 관련된 미스터리한 일들, 황재하의 가족들을 살해한 진범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여러 관계의 변화에 대해서도 우리가 밝혀내야 할 것들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다음 권에 대한 기대가 크다.

 

+ 마지막 번외에 실린 황후 왕작의 이야기도 마음에 남는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죄를 합리화할 순 없지만, 피해자든 가해자든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소리를 담아내려 한 작가의 노력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그저 아직 보지 못한 것에 대해 가지는 환상일 뿐입니다. 사람은 간혹 멀리 보이는 풍경을 더 좋게 보고,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을 가장 아름다웠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제가 황재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어쩌면 오랜 시간의 꿈이 와장창 깨질지도 모르지요." - P307

하나의 사건은 커다란 나무 한 그루와 같다. 땅 위로 보이는 부분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고, 땅속으로 거대한 뿌리가 얽히고설켜 땅을 파보기 전까지는 거기 파묻혀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 P313

사건과 연루된 악인이든, 선인이든, 권세가이든, 비루한 신분의 사람이든, 작가는 놓치지 않고 그들의 인생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탐욕스러운 인간의 본성을 사건과 인물을 통해 투영하면서도 악인들이 외치는 안타까운 호소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결국에는 주인공 황재하와 이서백의 시선을 통해 선악의 구분을 명확히 하여, 감정에 흔들린 독자에게 진실의 본질을 잊지 않게끔 다시 길을 안내해준다. - P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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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크니의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 - 일러스트레이터미네이터 키크니의 주문제작 만화
키크니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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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 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SNS 상으로 사람들에게서 사연을 받아 그 내용에 맞춰 자신의 생각이 담긴 한 컷의 그림을 그려준다. 컷마다 작가의 재치 넘치는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는데, 그 기발함에 책장을 넘기며 피식 웃기도 했고, 함께 뭉클해지기도 했다. 바쁜 일상에서 웃음을 잃고 싶지 않은 분들에게, 평소 책 읽기 어려워했던 분들에게 추천한다. 짧은 시간에 생각지 못한 여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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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갔어야 했다 쏜살 문고
다니엘 켈만 지음, 임정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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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시나리오와 소설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두 세계가 자연스레 눈앞에 펼쳐졌다. 해를 가하는 귀신이나 범죄자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읽는 내내 섬뜩하고 오싹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없었던 것이 새로 생겨나고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각과 각의 합은 어긋나고 뒤틀린다. 유리창에 비친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만이 사라진 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린 그 벌어진 틈 속에서 현실에 대한 강한 불안을 느끼게 된다.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가. 지금의 내가 보는 내 모습은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공간의 뒤틀림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정말 이곳에 제대로 존재하는 것일까. 다니엘 켈만이 풀어내는 공간지각 미스터리는 현대인들의 복잡한 삶과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누구보다 잘 나타내고 있다.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 와 함께 숨죽이며 공포에 떨기도 했고 미세한 소리에 집중하며 어긋난 부분을 찾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정신없이 발버둥 치며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뛰어다니기도 했고 결국엔 그 자리 그대로 돌아온 것에 대해 허무함을 느끼기도 오싹함을 느끼기도 했다.

 

처음 읽을 때 문장 사이에 걸렸던 가버려란 글자는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그 의미가 확실해지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처음 이 책을 받아 보았을 때 제목 사이에 희미하게 숨어 있던 가버려란 글자와 기록한 기억도 없는데 수첩 곳곳에 써진 가 버려란 글자가 누군가가(내가) 긴박한 상황에서 보낸 간절한 메시지임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그땐 우리 모두 늦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서 가, 가 버려.

 

읽을 때는 이 이야기의 결말이 내심 궁금했는데, 막상 결말에 다다르니 여전히 책을 읽는 중인 것 같다. 책을 덮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독특한 스타일의 소설. 인상 깊게 읽은 이 책 덕분에 다니엘 켈만의 전작들도 하나씩 읽어나갈 생각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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