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핑 뉴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9
애니 프루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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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감나는 묘사와 시적인 문장들로 가득한 소설이었다. 덕분에 읽는 내내 함께 바다를 나가 사나운 파도를 견디고, 코일의 힘든 시간들을 같이 겪으며 시공간을 공유한 기분이 든다. 사랑에 상처받은 코일이 새로운 사랑의 형태로 가족을 이루고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해나가던 모습과 거기서 나아가 육체적 성숙을 깨닫고 환희에 차오르던 모습은 우리에게 깊은 안도감을 선사한다. 어둡고 답답한 금속 상자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게 된 코일, 그의 앞으로의 여정이 더 기대되는 결말이다. 이렇게 수많은 가능성을 희망하며, 사랑으로 끝맺는 소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과학 저널들은 돌연변이 바이러스니, 죽음 직전에 생명을 구하는 의료 기계니, 파리가 진공청소기로 빨려들어가듯 은하계가 보이지 않는 거대 인력체를 향해 흘러가는 현상의 발견이니 떠들어댔지만 그건 타인의 인생이었다. 코일은 자신의 인생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트레일러 안을 돌아다니며 소리 내어 자문하는 습관이 생겼다. "누가 알아?" 그가 말했다. "누가 아냐고."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앞날에 어떤 일이 닥칠지 그 누가 알겠는가.
모로 세워진 상태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동전은 앞면으로도, 뒷면으로도 넘어질 수 있으니까. - P27

인간은 슬플 때 왜 우는 걸까, 하고 고모는 생각했다. 개, 사슴, 새는 눈물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고통을 삭인다. 동물들의 무언의 고통. 그건 아마도 생존 기술이리라. - P45

저 새는 바다와 바위와 하늘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도망쳐나와 코일의 빈방이라는 광막한 공간으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듯했다. 바닥을 밟는 그의 발이 내는 속삭임. 유리창 너머로 우유처럼 뿌연 바다가 누워 있었다. 어슴푸레한 하늘. 그 하늘에 마구 휘갈겨진 구름. 텅 빈 만, 저 먼 기슭은 안개에 싸여 있었다. - P160

코일은 풀 위에 누운 채 달려가는 웨이비를, 그녀의 푸른 치마의 주름이 점점 멀어져가면서 지워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고모, 아이들, 웨이비. 그는 대지와 합쳐지려는 듯 사타구니를 황무지에 대고 눌렀다. 흥분된 감각에, 먼 풍경이 그에게 너무도 중요하게 다가왔다. 바다와 거대한 바위를 배경으로 한 작은 형체들. 복잡하게 뒤엉킨 삶이 허울을 벗자 그는 인생의 구조를 볼 수 있었다. 생이란 바위와 바다, 그리고 그것들을 배경으로 잠시 스쳐가는 작고 하찮은 인간과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 코일은 순수에 대한 감각을 되찾고 떨리는 균형 속에서 세상사를 이해했다.
세상 모든 일이 전조라는 껍질에 싸여 있는 듯했다. - P290

"이 뜨거운 박스만 있으면 난 안 죽어." 코일은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이제 그는 빨간 아이스박스 안에 뜨거운 숯덩이가 가득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뚜껑에서 턱을 떼면 이가 정신없이 딱딱딱딱 맞부딪치다가도 다시 얹으면 말짱해졌다. 뜨거운 열기가 아니고서야 그 무엇이 그런 효력을 지닐 수 있겠는가.
황혼이 가까워진 걸 깨닫자 다시금 놀랐다. 아니, 어쩌면 기쁜 일인지도 몰랐다. 황혼이 지면 잠자리에 들 수 있으니까. 그는 너무 피곤했다. 넘실거리는 파도는 포근한 잠자리가 되어주리라. 그러자 묘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노란 옷의 남자는 죽은 게 아니다. 잠든 것이다. 쉬고 있는 것이다. 자신도 곧 남자처럼 엎어져서 잠에 빠져들리라. 빛이 꺼지면 바로. - P313

"잭의 기사 배정이 섬뜩하지 않나? 그는 우리의 개인적인 공포를 들쑤시고 있다구. 자네 경우만 해도 그래. 자동차 사고로 아내를 잃었잖아. 그런데 자네한테 뭘 맡겼나? 자동차 사고 기사. (...) 난 잭이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궁금해. 그렇게 자꾸 상처를 들쑤시면 고통이 무뎌지는 건지 아니면 고통은 원래의 상태 그대로 남는 건지. 난 고통은 그대로 남는다고 생각해."
(...) "그는 자신에게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의 부친과 조부, 두 형제, 맏아들, 그리고 막내아들까지 잡아먹을 뻔한 바다에서 살다시피 하잖아요. 난 고통이 무뎌진다고 생각해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그런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받는 거죠. 그러고 보면 불행은 여럿이 함께 겪는 게 좋다는 옛말이 일리가 있어요. 주위 사람들이 함께 죽으면 죽기도 한결 쉬워지는 거 아니겠어요?" - P326

집안 공기가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 방마다 무취의 가스 같은 과거가 무겁게 들어차 있었다. 멀리에서는 바다의 숨소리. 이 집은 고모에게 의미가 있다. 내게도 그럴까? 집 주위의 해안은 아름답지만 집 자체는 글러먹었다. 애초부터. 수마일이나 되는 얼음길을 끌려왔으니. 그것도 신도들에게 쫓겨나면서 고래고래 저주를 퍼부은 추방자들의 손에 의해 끌려와 바위 위에 얹힌 것이다. 이 집은 바위에 묶인 채 벗어나고 싶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있다. 바람에 윙윙대는 팽팽한 케이블. 그 진동이 집으로 전달되어 마치 집이 살아 있는 듯 느껴졌다. 그래서 집에 들어와 있으면 꼼짝 못하고 묶여 있는, 말은 못해도 느낄 수는 있는 짐승의 뱃속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우성치는 과거에 삼켜진 것 같았다. - P381

그는 도랑이 팬 길을 오르며 노인을 생각했다. 동물 시체와 끈을 사용하는 더러운 주술. 노인은 분명 달의 주기에 따라 살며, 이파리 위에 표시를 해놓고, 만에서 올라와 그를 덮치는 핏빛 비와 검은 눈雪을 보았을 것이며, 거위들이 매니토바주州의 늪에서 꽁꽁 언 채로 겨울을 난다고 믿을 것이다. 마음속의 적에 대한 최후의 방어라는 것이 고작 마녀매듭인 노인. - P384

"당신 선물을 살 시간이 없었어." 그러곤 꼭 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을 펴자 양 손바닥에 갈색 달걀이 하나씩 있었다. 코일은 그것들을 집었다. 차가운 감촉. 그는 페틀의 행동이 다정하고 멋지다고 여겼다. 중요한 건 달걀이 아니라 그것이 그녀의 손으로 건네진 선물이라는 상징성이었다. 그에겐 그것으로 족했다. 그 달걀이 어제 슈퍼마켓에서 자기가 산 것이라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페틀이 자신의 속마음을 아는구나 생각했다. 나에게 진짜 중요한 건 선물을 주는 마음, 선물을 건네는 손길이라는 걸 알 만큼 그녀는 날 사랑하고 있어. - P405

"엄마는 뉴욕에서 차 사고가 나서 여기 못 와요. 깨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난 엄마를 깨울 수 있지만 너무 멀어서 못 가요. 그래서 어른이 되면 갈 거예요." - P437

코일은 딸에게 질질 끌려가며 웨이비의 눈길을, 그녀의 미소를 보았다. 아, 그만을 위한 눈길과 미소! 계단을 오르는데 문득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사랑은 돌아가면서 하나씩 꺼내 먹는 종합 사탕 봉지 속의 다양한 사탕 같은 것이고 우리는 사탕을 맛보듯 사랑도 이것저것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혀에 톡 쏘는 맛을 남기는 것, 밤의 향기를 일깨우는 것, 속이 쓸개처럼 쓴 것, 꿀과 독을 섞은 것, 금방 삼키게 되는 것. 그리고 평범한 눈깔사탕과 박하사탕 틈에 희귀한 것들도 섞여 있다. 독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것들 한두 알과 평온과 부드러운 기쁨을 주는 것. 지금 그의 손은 그 평온과 부드러운 기쁨의 사탕을 집으려 하고 있는 것일까? - P455

욕조에서 나와 수건으로 몸을 문지르다가 욕실문 뒤에 달린 전신 거울의 김을 닦아냈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정말 거구였다. 굵은 목, 거대한 턱, 짧고 억센 구릿빛 털이 박힌 두둑한 뺨. 누르스름한 주근깨. 우람한 어깨와 탄탄한 팔뚝, 늑대인간 같은 털복숭이 손. 불룩한 배까지 내려온 젖은 가슴털. 불그레한 음모의 숲에 둘러싸인, 뜨거운 목욕물에 선홍색으로 익은 큼직한 성기. 허벅지, 나무밑동 같은 다리. 그러나 그 모습은 뚱뚱하다기보다는 힘센 장사처럼 보였다. 코일은 자신이 육체적 성숙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중년이 머지않았지만 두렵진 않았다. 이제 못생긴 부분들을 헤아리기가 어려워졌다. 그건 어쩌면 헤아릴 수 없게 서로 뒤섞였거나 희미해져서 전체적인 모습으로 합쳐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겨드랑이가 터진 회색 잠옷을 걸치자 젖은 등짝에 옷이 달라붙었다. 다시금 환희가 스쳐갔다. 까닭도 없이. - P473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 죽어요." 웨이비가 말했다. "인생에는 슬픔과 상실이 있죠. 아이들도 그걸 이해해야 돼요. 그애들은 죽음을 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버니가 악몽을 꾸는 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까봐 두렵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페틀과 워런과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말이에요. 그리고 고인을 봐도 그 기억 때문에 괴롭진 않아요. 그건 잘 알려진 사실이죠." - P480

"모두들 알다시피 우린 스쳐가는 인생일 뿐이야. 우리도 이 바위땅을 잠시 더 걸어다니고 배를 몇 번 더 탈 뿐이지 모두 죽을 목숨들이라구. 바다는 검은 꽃이고 어부는 그 꽃 한가운데 있는 벌이지." - P481

"웨이비 아줌마, 그 새가 아직 있나 보러 갈 수 있어요?" 잔뜩 긴장한 고사리손이 코바늘로 뜬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그럼. 가서 보자. 하지만 거센 폭풍이 지나갔으니 그 가벼운 작은 새의 시체는 바람에 날려갔을 수도 있고 파도에 씻겨갔을 수도 있어. 갈매기나 고양이가 점심으로 먹었는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그 새를 찾지 못할 수도 있어. 켄에게 거기까지 태워다달라고 부탁해보자. 그런 다음 우리집에 가자. 코코아 만들어줄게."
바위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새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풀포기 위에 작은 깃털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다른 새의 깃털일 수도 있었다. 버니는 그 깃털을 집어들었다.
"새가 날아갔어요." - P486

잭 버깃이 피클 단지에서 벗어났다면, 목이 부러진 새가 날아갔다면, 또 어떤 일이 가능할까? 물이 빛보다 먼저 생겼을 수도, 뜨거운 염소 피 속에서 다이아몬드가 깨질 수도, 화산이 차가운 불을 뿜어낼 수도, 바다 한가운데에 숲이 나타날 수도, 게 위로 손만 가져가도 그 손 그림자에 게가 잡힐 수도, 매듭 속에 바람이 갇힐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고통이나 불행이 없는 사랑도 가끔은 있으리라. - P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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