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동체든 그곳이 어떤 곳인지,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마디로 어떤 상황인지 합의조차 할 수 없다면 이미 위기에 빠진 공동체입니다. - P126
왜 하필 나냐, 이 질문을 자제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어떤 일이든 원인은 있겠으나 반드시 무슨 목적이 있으란 법은 없다는 고통스러운 진리를 깨닫기 시작한 터였다. 설령 어떤 일이 어쩌다 일어났는지 알아내더라도-어떻게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더라도-왜라는 질문의 해답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은 아니다. 질병과 같은 자연의 이상 현상은 동기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응답하지 않는다. - P156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 속에 갇혀 있어요. (...)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이야기 속에 갇힌 수감자 신세, 모든 가족은 가족사의 포로, 모든 공동체는 또 그들만의 이야기 속에서 꼼짝도 할 수 없고,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기억하는 역사의 피해자가 된다. 세계 곳곳에서 이야기끼리 맞붙어 전쟁을 벌이는데, 양립할 수 없는 둘 이상의 이야기가 같은 공간을 차지하려고, 말하자면 같은 지면을 차지하려고 싸우기 때문이다. - P171
이게 우리의 비극이죠. 우리는 온갖 허구 때문에 죽어가지만 어쩌면 그런 허구가 다 사라져도 죽으리라는 것. - P173
진정한 현실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안다. 세상은 평범한 시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칠고 사납고 기이하다. 평범한 시민은 진실을 외면하고 베일로 눈을 가린 채 무지한 상태로 살아간다. 베일을 벗고 세상을 바라보면 두려워지고, 확신이 무너지고, 기가 꺾이고, 결국 술이나 종교로 도피하게 된다. 이 세상은 원래 그대로가 아니라 그가 만들어놓은 세상이다. 그는 스스로 구상한 세상에 살고, 이 세상을 잘 다루고, 이 세상을 움직이는 조종간이나 엔진, 끄나풀이나 열쇠가 무엇인지, 어떤 단추는 눌러야 하고 또 어떤 단추는 누르지 말아야 하는지 안다. 그가 창조하고 조종하는 진짜 세상이니까. 험한 세상이지만 상관없다. - P196
이븐루시드가 가잘리에게, 티끌이 티끌에게 말했다. "비이성은 비이성인 까닭에 자멸하기 마련이오. 이성이 잠깐 토막잠을 잘 때도 있지만 비이성은 아예 혼수상태에 빠질 때가 많으니까. 결국 비이성은 영원히 꿈속에 갇혀버리고 마침내 이성이 승리할 거요." 그러자 가잘리가 말했다. "인간이 꿈꾸는 세상은 자기가 만들고 싶은 세상일세." - P210
활동적인 사람이(혹은 마족이) 마침내 사색을 통해 스스로 나아지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를 경계해야 한다. 어설픈 사색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 P211
이븐루시드는 두니아의 몸을 어루만질 때마다 그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찬양해 짜증이 날 정도였다. 내 생각은 칭찬할 가치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자 그는 정신과 육체는 하나라고 대답했다. 정신은 인체의 틀이므로 인체의 모든 활동을 좌우하는데 그중 하나가 생각이다. 따라서 육체를 칭찬하는 것은 그것을 지배하는 정신을 칭찬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렇게 말했고 이븐루시드 자신도 동의한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 육체보다 오래 살아남는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는 신성모독적인 말을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기도 했다. 정신이 육체에 깃든 것이라면 육체 없이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 그녀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븐루시드는 플라톤은 달랐다고 인정했다. 플라톤은 정신이 새처럼 육체 안에 갇혀 있으며 그 새장을 벗어나야 비로소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다고 믿었다. - P217
우리는 수없이 되풀이되며 입에서 귀로, 귀에서 입으로, 그렇게 우리에게 전해진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이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경험담이지만 때로는 한 사람의 작품으로 여기기도 한다. 호메로스, 발미키, 비야사, 셰에라자드.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간단히 ‘우리’라고 칭할 뿐이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생물인지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생물이다. 우리에게 전해진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면서 처음에 지녔던 특수성을 잃어버리는 대신에 본질적 순수성을 얻어 이야기 자체만 오롯이 남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혹은 우리가 선호하는 표현으로는 그러한 이유로, 비록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이었는지 우리 스스로는 알 수 없지만 비로소 우리가 아는 이야기가 되고, 우리가 이해하는 이야기가 되고,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우리의 현재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 P271
아이라가이라는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기계이기에 이렇게 온 나라가 매달려 만들어야 할까? 뱃사람은 이 기계 속에 배를 통째로 밀어넣고 농부는 쟁기를 집어넣어야 했습니다. 기계를 만드는 거대한 공장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동안 그는 기계 속에 호텔을 짓는 호텔 경영자도 보고 영화촬영용 카메라와 방직기도 보았지만 호텔에는 손님도 없고 카메라에는 필름도 없고 방직기에는 헝겊 쪼가리도 없었습니다. 기계가 커질수록 의문도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여기저기서 기계를 만들 공간을 마련하느라 동네를 송두리째 밀어버렸는데, 아이라가이라가 보기에는 기계와 나라가 이미 동의어가 되어버린 듯했습니다. 이제 나라 안에는 그 기계 말고는 남은 공간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 P276
그게 바로 나야! 그녀가 외쳤다. 나야말로 아무런 목적도 없는, 고작 영광처럼 허무맹랑한 목적을 내세운 기계를 만드느라 고생고생하며 기나긴 세월을 허비했어. 그런 노력이 자멸의 길인 줄도 모르고 내가 만들려 했던 기계는 바로 내 삶이고, 기계 따위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목적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영광을 차지하는 일이었어. 나야말로, 대장장이나 선생이나 철학자가 아니라 나야말로 질병과 건강의 차이를, 전염병과 치료법의 차이를 깨닫지 못했던 거야. 너무 비참해서 나는 아버지가 딸을 멸시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건강한 상태라고, 오히려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게 재앙이라고 믿었어. 그런데 이제야 진실이 드러난 거야. 아버지는 탈이 나셨고 나는 멀쩡해. 아버지를 중독시킨 독이 뭐냐고? 아버지 자신이겠지. - P285
의미란 여러 조각이 없어져버린 퍼즐과 같아서 인간이 친밀도를 바탕으로, 즉 자기가 잘 아는 파편들을 가지고 형성해가는 것이다. - P286
인간은 시계의 포로다. 주어진 시간이 지독하게 짧기 때문이다. 인간은 구름의 그림자처럼 빠르게 움직이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 P288
험담이란 말로 빚은 진흙 같은 것, 진흙이 으레 그렇듯이 찰싹 달라붙기 때문이다. - P296
이것은 우리 인류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인데,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라서 때로는 이것이 역사인지 신화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진다. 어떤 이들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누구나 동의하는데,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곧 현재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환상적인 이야기, 상상을 다룬 이야기는 곧 현실을 이야기하는 다른 방법이기도 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야기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할 텐데,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무의미한 일을 가급적 피하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역사를 탐구하고 서술할 때 자문해보는 질문이 바로 이거다. 거기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까? - P304
역사는 얼마나 불완전한가! 반쪽뿐인 진실, 무지, 속임수, 가짜 단서, 착오, 거짓말 등의 오리무중 어딘가에 진실이 묻혀 있으련만 우리는 믿음을 잃어버리기 쉽고, 그래서 다 허깨비다, 진실 따위는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누군가의 절대적 신념이 또 누군가에게는 망언에 불과하다, 그렇게 말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이란 한낱 상대주의 궤변가의 주장만 듣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것이라고 강력히, 정말 강력히 강조한다. 진실은 반드시 존재한다. - P322
정보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면서 이미 아는 사실만 이야기할 때 비로소 대중은 더 신뢰하기 마련이다. - P323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변했는지 서서히 깨닫는 중이었다. 공중부양을 겪었다는 것까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도 견뎌내고 받아들였다. 하강은 무심결에 해낸 일로 떠오를 때만큼이나 뜻밖이었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일찍이 상상조차 못했던 비밀 자아가 눈을 뜬 결과라는 것도 이해했다. 그러나 지상으로 다시 내려오는 데 어쩌면 인간적 측면도 함께 작용했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잘못했다는, 자기가 잘못한 탓이라는 생각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허공에 떠 있던 외로운 시간 동안 그는 일생의 온갖 어두운 기억을 직시했다. 예전의 인생과 결별하는 아픔, 그를 외면하고 그 역시 외면했던 인생행로에 대한 번뇌. 그는 이 깊은 상처를 인정하고 자신에게 보여줌으로써 고통보다 강해졌다. 그리하여 중력을 되찾아 지상으로 내려왔다. 최초 감염자가 질병의 근원으로 끝나지 않고 치유의 근원이 되었다. - P326
사람이 죽음 근처에 가보고 나면 사랑의 용량이 커진다. - P363
인식의 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 마족의 사악하고 극악무도한 모습은 곧 인간의 극악무도하고 사악한 일면을 비춰주는 거울과 다름없음을 깨달았고, 인간의 본성에도 똑같은 무분별이 있어 무자비하고 괴팍하고 악의적이고 잔인함을, 마족과의 싸움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싸움과 닮았음을, 따라서 마족은 현실인 동시에 추상적 개념임을, 그들이 하계로 내려오면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근절해야 하는지 보여주었음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바로 비이성이었고, 비이성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는 흑마족의 이름이었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테리사 사카의 자기혐오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녀가 이미 알듯이 제로니모 자신도 내면에 깃든 마족 자아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마족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의 무분별도 물리쳐야 비로소 이성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다. - P397
분노는 제아무리 정당하더라도 결국 분노한 자를 망가뜨리기 마련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 새로 태어나듯이 증오하는 것으로 인해 몰락하고 파멸한다. - P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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