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못하는 여자 - 린다 B를 위한 진혼곡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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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작가 루디안 스테파는 갑작스레 당 위원회의 소환을 받는다. 자신의 작품 때문에 부른 것일까 아니면 연인 미제나가 자신을 고발한 것일까. 하지만 당 위원회가 그를 부른 진짜 이유는 유배상태였던 여자 린다 B에 관한 것이었고, 그제야 그는 이곳에 오지 못한 친구를 대신하여 책에 사인을 받으러 왔던 한 여인을 떠올린다. 친구가 선생님의 책을 좋아한다며 책에 린다 B라고 써주길 바랐던 여인과 린다 B에게, 저자의 추억을 담아. 612.’이라고 적었던 자신을. 군주제 시절의 옛 왕실 측근 집안이었던 린다 B는 며칠 전 자살을 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엔 루디안 스테파의 헌사가 적힌 책과 그의 이름이 자주 나오는 그녀의 일기만 남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대체 린다 B는 누구이며 왜 자살을 했을까. 그리고 그 자살에 루디안 스테파 자신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알바니아의 문학 대사라고 불리는 이스마일 카다레. 나는 이 책을 시작으로 작가의 또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어볼 것 같다. 책의 흐름은 루디안 스테파의 입장에서 주로 서술되는데, 중간 중간 등장하는 그의 원고와 신화 오르페우스 이야기, 꿈과 상상의 서술은 무척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이 책이 뛰어났던 건 루디안 스테파와 연인 미제나, 그리고 그녀의 친구인 린다 B의 관계에 있다. 군주제 시절의 옛 왕실 측근 집안이라는 이유로 평생을 벽지에 유배되어 있어야만 했던 린다. 그녀에겐 이동할 자유가 없었다. 더 큰 미래를 꿈꿀 자유도 없었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갈 자유도 없었다. 그녀에겐 차라리 암에 걸리는 것이 희망의 길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단 몇 개월만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녀가 평생 바라던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유일한 친구, 미제나. 린다는 미제나와의 우정을 통해 숨을 쉬었고, 그녀를 통해 TV와 책으로만 접했던 바깥세상을 느껴본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사랑하는 이를 만나려 한다. 미제나와 린다의 우정, 루디안 스테파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 매개 소유, 자유에 대한 열망. 책을 읽는 내내 린다의 삶이 안타깝게 느껴져 마음이 먹먹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당이 정해놓은 현실적 제약에 묶여 자유를 빼앗겨버린 린다. 그녀는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긴 것에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그 친구를 통해 꿈꿔왔던 사랑을 느끼려 한다.


그녀의 짧은 생에 대해 생각해본다. 죽은 린다의 시신을 꺼내 수도로 데려가던 가족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어른거린다. 생에서는 결코 벗어나지 못했던 그곳에서 벗어나 그녀는 이제 자유로울까.



이 세기말에 암의 존재를 확인하는 유방검사가 갑자기 궁극적인 기회가, 거의 구원의 기회가 되다니. 게다가 그걸로 부족한지 암이 없다는 결과가 거꾸로 죽음의 소식을, 모든 희망의 종말을 의미하다니. 여자는 자기 목숨을 걸고 며칠을, 단 몇 시간의 정상적인 삶을 사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 희생마저 거부당했다. (…) 프롤레타리아독재가 강력할수록 자유는 크리라. 사방에 새겨진 말이었다. 공연장 벽에, 발코니에, 국가의 상징 아래. 이 글이 펄럭이는 붉은 깃발 아래 모두가 조금도 놀라지 않고 행진했다. 이 글귀에 누구도 놀라지 않는데, 거의 쌍둥이처럼 똑같은 문구를 읽고 어찌 아연실색하겠는가? 암이 우리의 행복을 만들어주리라는 문구 말이다. - P160

고백하자면…… 난 이 일이 일어나길 바랐어…… 숨기지 않겠어. 그걸 상상하면 질투가 났지. 그러면서도, 완전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마음속으로 바랐어. 그 길이 단 한 번의 유일한 기회였으니까…… 나의 무언가가…… 건너편에 다다를 기회 말이야. - P177

이해하겠니? 난 단 하루도 자유를 경험하지 못할 거야. 린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상상이 가니? 단 하루도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 말이야…… 어디에도 아무 희망을 걸지 못한다는 것…… 어디에 기대야 할지 몰라서 난 암에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어…… 암이 도와주길 기대했어…… 그런데 암마저도 날 거부했어…… (…) 모든 건 관점의 문제야…… 다시 말해 감옥에 구속된 죄수에게는 나처럼 거주지를 지정당한 사람들이 자유로워 보일 테지. 다시 말해 별것도 아닌 일로 앓는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 자기 작품에 가해진 검열에 대해 투덜거리는 루디안에게 나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어. 이런 식이지. 그래, 이건 우리가 이미 얘기한 적 있는 우주의 역사만큼이나 복잡한 문제야. 어쨌든 우리 이해를 벗어나는 무한한 공간과 시간처럼 말이야. - P183

미제나는 나중에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이 순간을 곰곰이 생각했지만 그 행위를 무엇이라 규정해내지 못했다. 그것은 동성애보다 훨씬 근원으로 거슬러올라가는 것이었다. 훨씬 덜 알려졌고, 분명히 훨씬 더 금지된 것이었다. 그것엔 이름도 없었다. 그것뿐 아니라 두 여자 사이에서 벌어진 그 어떤 일도 뭐라고 명명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난 일은 더더욱. 두 사람은 가까운 만큼 멀었다. 서로…… 어루만지며…… 매개애무를 행하는 두 여자. 두 여자 사이에는 영혼 없고 무심한, 얼어붙은 벌판이 있었다. - P188

당신 있는 곳까지 오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순결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아니, 불가능했어요. 철조망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개들이 엄청나게 많고, 무척이나 추웠어요. 그는 외칠 뻔했다. 당신, 나를 이해 못하는군요. 그건 망설이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결정을 내릴 사람은 그가 아니라 오직 그녀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 이야기에서 모든 것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 옆에선 모든 게 죄인이었다. 이 나라, 이 시대, 그를 포함해서 다른 모든 것이. - P212

지상에 있는 그들보다 땅속의 딸은 이중으로, 국가와 죽음으로부터 이중으로 속박되고 고통받은 터였다. 그들에겐 죽음의 사슬이 없으니 적어도 더 무거운 국가의 족쇄는 벗을 수 있을 것이었다. (…) 모터소리가 갑자기 달라졌다. 길은 조금씩 오르막으로 변했다. 하지만 극심한 요동과 시커먼 연기를 그러려니 할 정도는 아니었다. 차는 힘겹게 나아갔고, 그들은, 남편과 아내는 다시 양쪽을 살폈는데 이번에는 공포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배구역이 끝나고 그들이 천천히 눈 먼 땅의 뱃속으로 새로 발을 들여놓은 듯한 지점에서 문득 땅이 딸의 몸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는 느낌을 똑같이 받았다고, 나중에 서로에게 털어놓았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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