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단경로 - 제25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강희영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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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새로운 곳에 가게 되면 자연스레 스마트폰으로 길을 검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맵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거기까지 소요되는 시간과 교통수단을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 화면에 띄워진 많은 경로 중 최단경로를 선택하게 된다. 이는 지금까지 살아온 대부분의 인생에서 우리가 익히 해왔던 일이다. 중간에 무엇이 있는지 일일이 가르쳐 주지 않았을 때 아이가 엄마에게 그대로 뛰어가게 되는 거리, 두 점이 이어지는 직선, 이 점에서 저 점까지 이어지는 가장 빠른 방법. 하지만 강희영 작가의 장편소설 <최단경로>는 이런 우리들의 익숙한 선택에 의문을 던지며 빠른 길만이 정답이 아님을, 오히려 최단경로만을 추구함으로써 우리가 외면해왔을지 모를 책임과 공감의 연대를 묵직하게 느끼게 만든다.

 

전임자 진혁이 혜서에게 남긴 건 그의 자리와 그가 진행하던 프로그램만이 아니었다. 실수인지 의도인지 알 수 없는 로그아웃이 안 된 그의 노트북과 오류인지 모르지만 뭔지 모를 강한 의도성이 느껴지는 트랙 사이에 숨겨진 소리. 그렇게 진혁이 남긴 의문의 소리를 시작으로 혜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애영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삶들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 혜서가 진혁의 동선을 따라 미행하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그녀의 갑작스런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 자신이 그곳에 가려는 이유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했던 것처럼 지켜보는 나 또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진혁과 특별한 사이도 아닌 그녀가 그저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작은 파편에 얽매어 그토록 원하던 프로그램도 뒤로한 채 충동적으로 비행기에 오른다는 설정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끌림에 동행하게 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었고, 숨겨진 이야기에 자그마한 호기심이 일게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의도가 그렇지 않았다고 해서 자신의 행동이 모두 정당화되진 않는다는 것을. 애영과 자신의 아이를 책임지지 못했던 진혁의 행동이 그러했고, 가브리엘의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적 인사가 그러했으며, 애영의 아이와 엄마를 죽게 만든 교통사고가 그러했다. 그로 인한 죄책감과 죄의식은 목소리로 남아 삶의 패턴 속으로 숨어들었고, 의식하지 않으면 쉽게 찾아낼 수 없는 그곳에서 이들의 마음은 조용히 묻혀간다.

 

수많은 트랙 사이에 아이 목소리를 숨겨놓으면서 진혁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이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던 그의 뒤늦은 인사는. 이 주에 한 번씩 찾아와 아이의 애착인형이던 곰 인형을 횡단보도에 묶어둬야 했던 애영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 옹알이처럼 다신 낼 수 없는 아득한 소리를 끝없이 그리워해야 했던 그 마음은. 안락사를 계획하면서도 아이에게 제대로 설명해주기 위해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시작한 그녀의 일상은 여전히 나를 먹먹하게 하고 아프게 만든다.

 

지난번에 두고 간 곰 인형이 사라져 있었다. 누가 그랬을까. 아이였으면. (113p)

 

아이에게 말해줘야 하거든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생긴 건지. 완전히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설명해줘야 해요, 아이한테는. 그러려면 배우는 수밖에 없어요. 내 아이는 어쩌면 손을 들지 않고 횡단보도를 건너다 그렇게 됐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자기가 엄마 말을 안 들어서 그렇게 됐다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이죠. 나한테 미안해할지도 몰라요. 또 우리 엄마는요, 우리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나는 배우고 죽어서 아이랑 엄마한테 얘기해줘야 해요. 그런 게 아니라고. 그게 그런 게 아니라고. 내 아이는 그걸 모른단 말이에요.”

다 배운 뒤에도 모르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건데요?”

그럼 그렇게 말해야죠. 엄마가 노력했다고. 그런데 그래도 잘 모르겠다고. 모르는 건 잘못이 아니라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고요. 우리 엄마한테도.” (123p)

 

애영은 헤드폰을 쓰고 파일을 재생했다. 그 고요를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잠든 아이의 맑은 숨소리를 듣던 무수한 밤의 공기가 귓속을 채웠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159p)

 

혜서의 미행으로 시작된 이 여행은 여러 사람의 시선에서 따라가게 된다. 혜서 본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가 어린 애영과 진혁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가 또 나이든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가 어느새 마이레의 시선으로, 또 한편으론 한국에 남겨진 민주의 시선으로, 그리고 마지막에 가선 기계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각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그들의 삶은 왠지 모를 슬픔과 아픔을 담고 있다. 한없이 외로워지고 끝없이 갑갑해지는 순간이다. 최단경로로 삶을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최적의 경로로 삶을 살아가는 것 또한 힘겹게만 느껴진다.

 

진혁의 무책임한 선택과 기계의 치명적인 오류로 상처받은 애영이지만, 그런 애영의 상처를 보듬어준 것은 곁에 있는 마이레와 우연히 만나게 된 혜서였다. 생판 몰랐던 그들이 그녀의 가장 깊숙한 부분을 어루만져주는 부분은 우리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상처 주는 것 또한 곁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위로와 치유도 그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그러니 함께 있으라고.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여기에 적힌 이야기보다 바깥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한국에 남겨진 민주의 새로운 일상에 관심이 갔고, 여기 적히지 않은 진혁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살아는 있을까. 아니면 이곳에서는 닿지 않는 어딘가로 이미 멀리 떠나 버렸을까. 그가 한 선택들과 그가 느낀 감정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동안 최단경로만을 택해오면서 우린 실상 많은 것들을 놓치며 지나쳐 왔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곁에 있어준다는 것, 함께 한다는 것,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고 상대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을 외면한 채 지나쳐 왔는지도, 그렇게 서로를 여러 번 놓쳐왔는지도 모른다. ‘미행동행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의 끝이 외롭지 않은 건 결국 서로가 함께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애영의 마지막 말이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어디 가지 말아요.”

 

피드백에 써놓지는 않았지만, 나는 사실 애영씨의 코드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어요. 내가 만약에 한 가지 경로를 택해야 한다면 분명 그 길로 가볼 거예요. 물론 평가기준과는 조금 다른 얘기죠.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그 길을 달린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더군요. 조금 돌아가긴 해도 지루하진 않을 것 같아요. , 맵을 보고 길을 찾다보면 오히려 계속 두리번거리게 되잖아요. 어디서 꺾나, 잘 가고 있나, 혹시 지나친 건 아닌가, 그러면서 말이죠. 그런데 애영씨 코드대로 경로를 설정하면 낯선 길이라도 좀 마음 편하게 즐기면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단순하잖아요. 가까운 운하를 찾아서 물길을 쭉 따라간다. 재미있었어요.” (1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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