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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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희와 화자의 우정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재희와 성소수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화자.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던 두 사람은 자연스레 한 공간에서 함께 살게 되지만 두 사람에게 극히 자연스러웠던 이 동거는 남들의 눈에 오해를 사기 쉬웠고, 세상의 많은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화자의 삶에서 재희는 재호로, 재희의 삶에서 화자는 지은으로 살아가며 주변의 이목을 가린 채 서로에게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주기로 한다. 재희는 화자를 통해 게이의 힘든 점에 대해 알게 되었고, 화자는 재희를 통해 여자의 삶 또한 만만찮게 힘들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들의 시간은 재희에게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그녀의 남자친구가 그들의 비밀을 처음 알게 되면서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는다. 몇 번의 크고 작은 다툼 끝에 재희와 화자의 비밀을 받아들이기로 한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하게 되고 재희는 그와 함께할 새로운 미래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세상에 또 다른 테두리를 만들어갈 재희. 앞으로 그녀가 만드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박상영 소설가의 전작들이 으레 그렇듯 이번 단편에서도 그들이 나누는 위트 있는 대화에 피식 웃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유쾌함마저 느껴졌다. 덕분에 간혹 무겁고 심각할 수 있는 주제가 나올 때에도 갑갑하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이번 단편 <재희>에서는 여성인 재희를 중심인물로 등장시킴으로써 여성의 삶에 대해서도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데, 임신, 출산, 낙태에 관한 세상의 한 편중된 의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끝으로 화자의 애인이었던 K3가 보낸 마지막 문자가 유독 마음에 남는다. 모든 일들이 그렇듯 너무 크고 지나친 집착은 문제가 되지만, 어떻게 사랑에 있어서 '집착'의 감정이 아예 없을 수 있을까

 

누구든 떠들어대도 괜찮지만, 그 누구가 재희라는 것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다른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 얘기해도 재희만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 재희니까. 재희와 내가 공유하고 있던 것들이, 둘만의 이야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게 싫었다. 우리 둘의 관계는 전적으로 우리 둘만의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언제까지라도. - P51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 - P66

선반에서 밥공기를 꺼내 블루베리 봉지를 뒤집었다. 보라색 얼음 조각 하나만이 툭 떨어질 따름이었다. 그때, 영원할 줄 알았던 재희와 나의 시절이 영영 끝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때에 맞춰 블루베리를 사다놓던 재희. 내가 만났던 모든 남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내 연애사의 외장하드 재희.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우며, 가당찮은 남자만 골라 만나는 재희.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명명되는 시절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재희는, 이제 이곳에 없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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