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황금방울새 - 전2권
도나 타트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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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 오프라인 서점에서 처음 이 책을 발견했을 때가 떠오른다. 숨죽인 채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며 쌓여있던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나를 보고 있던 시선, 반쯤 찢어진 종이가 나풀거리고 그 틈 사이에서 나를 맹렬히 보고 있던 그 노랗고 작은 새 한 마리를.

 

약속시간에 맞춰 서둘러 그곳을 지나가는 그 짧은 시간에도 깨끗한 새 책들 사이에 놓인 찢어진 표지는 내게 있어 충분히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그 당시 얌전하게 표지가 덮여 있는 다른 책들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내게 깊숙이 각인되었다. 이 책을 지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건 그때의 이끌림이 여전히 지금까지도 이어져왔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이들이 그렇듯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고 달라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과거의 숱한 결정에 대한 수많은 가정을 하게 된다. ‘그때 이랬더라면 어땠을까. 이게 아니라 저걸 선택했더라면. 다른 날 저곳에 갔더라면. 그 사람과 가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가정들은 우리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심하게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마저 빼앗아 버리지만, 현실이 막막할 때마다 앞이 더 불행해질 것 같을 때마다 이러한 가정을 우린 쉽게 놓을 수가 없다. 미술관 테러사건으로 사랑하는 엄마를 잃은 이 책의 화자 시오 또한 그랬다. 달라질 게 없단 걸 알면서도 끝없이 무수한 가정을 만들어냈다. 내가 그때로 돌아가서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그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나는 미술관이 아니라 식당에 가자고 우기지 않았을까? 왜 비먼 선생님은 화요일에, 그것도 아니면 목요일에 우리를 부르지 않았을까? (118p) 매일 함께할 것 같았던 엄마와의 일상이 사라졌고, 자신 때문에 엄마가 죽은 거라는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엄마가 없는 현실에 대한 부정, 앞으로의 불안한 일상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서 예전에 친하게 지낸 친구 앤디의 집에서도, 아빠를 따라 갑작스레 가게 된 라스베이거스의 집에서도, 다시 돌아와 살게 된 호비 아저씨네 집에서도 그는 삶보다 죽음을 더 가까이하며 불안하고 어두운 숨을 몰아 내쉬어야 했다. 먼 앞날에 대한 안락보다는 당장의 고통을 줄여줄 쾌락을 택했으며 설사 그것이 잠깐밖에 허락되지 않는 쾌락일지라도, 그 뒤에 더한 고통과 괴로움이 따를지라도 그는 그러한 쾌락이 있는 곳에서만 숨을 쉴 수 있었다. 그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약이 필요했고, 먹고 살기 위해선 도둑질을 해야만 했으며, 그의 행동에는 종종 거짓말이 따라야 했다. 미술관에서 처음 웰티 할아버지와 대화를 했을 때부터, 그때 그 부탁을 들었을 때부터, 그에게서 그림 <황금방울새>를 떠맡게 된 후부터, 엄마를 잃은 그날 그때부터 그에겐 그러한 것들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남들이 부정하다고 하는 그 모든 어두운 것들이.

 

따로 상상할 필요도 없이 소설 속 모든 일들은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아니, 책을 읽으면서 늘 그와 같은 시간을 보낸 것만 같다. 심지어 꿈속에서조차 나는 시오를 따라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했으며, 꿈속을 헤매고, 그림을 보고, 누군가로부터 도망을 쳤다가, 다시 어떠한 지점으로 되돌아와 거짓말을 하고, 살아가면서 그가 했던 그 모든 것들을 시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이 호비 아저씨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했을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진실을 털어놓아야 했을 때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피파를 간절히 원할 때에도, 바버 부인에게 가족의 정과 사랑을 갈구할 때에도, 보리스와 함께 방탕하고 위험한 생활을 할 때에도, 그림을 찾기 위해서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을 때도 늘 그와 함께 했다. “그러지 마, 시오. 그러면 안 돼. 더 이상 그곳으로 가지마. 돌아와. 여기서 더 나쁜 길로 가면 안 돼. 진실을 말해. 이제라도 바른길로 돌아와야 해.”라고 듣지 않는, 들을 수 없는 그에게 수없이 소리치면서도, 그에게 있어 바른길이란 게 도대체 무엇일지 내가 생각하는 바른길이란 게 정말 그에게 필요한 것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시오의 삶이 여기서 더 이상 나빠지지 않기를, 그에게도 부디 조그만 평안이 허락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떨리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살아가기 위해서 죽음 가까이에 붙어왔던 시오, 그는 늘 죽음을 갈구하면서 살아왔다. 그에게 만약 피파와 호비 아저씨가 없었더라면, 골동품이 없었더라면,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던 바버 가의 식구들과 잠깐 동안이지만 함께 했던 아빠와 그의 여자친구 잰드라, 그리고 그때 만난 소중한 친구 보리스가 없었더라면 그의 이야기는 한참 전에 이미 끝났을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에게 큰 불안을 가져다준 그림 <황금방울새>가 주는 위안이 없었더라면 그는 이 이야기의 끝까지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호비 아저씨가 시오에게 해주었던 말처럼 나는 예술이 누군가에게 있어서 아주 오래도록 깊이 남다른 방식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 것만 같다. 시오의 황금방울새만큼은 아니더라도 내게도 남다르게 다가오는 그런 작품이 있다. 그동안 나를 바꾸어준 작품. 미술작품으로 시작해서 소설, 영화, 장르를 불문하고 나를 바꾸어준 그 모든 예술 작품들을 떠올려본다. 나에게만 남다른 언어로 말을 걸어왔을 그것들을. , 그래, . 얘야. 그래, . 네 거야, 네 거. 난 널 위해서 그려졌어.

 

책을 다 덮고 나서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그림 <황금방울새>를 다시 찾아보았다. 단조로운 배경을 뒤로하고 홰에 사슬로 발목이 묶인 작은 새. 시오가 묘사했듯이 작고 부드러운 가슴털과 연약한 발톱, 뚫어져라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 나는 그 시선에서 무언가 슬프고 고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그만의 단호한 의지를 느낀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날지 못하게 묶여 있는 그 작은 생명이 그가 처한 현실이 슬프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시오의 말처럼 우린 이 그림을 그린 파브리티우스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운명을 미리 내다보았을 수도 있고, 한 인간에 대한 초상화를 그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그림을 통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는지도. 다만 두려워하지 않고 절망조차 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새, 세상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하는 새를 보며 물러나기를 거부하게 된 시오의 마지막 변화된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속삭이는 그 그림의 내밀한 비밀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 그래, . 얘야. 그래, . 네 거야, 네 거. 난 널 위해서 그려졌어.

 

시오의 다짐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불속에서 구해내고 사라졌을 때는 찾으려 애쓰고 보존하고 구하려고 노력하며 지켜온 사람들의 역사에 나의 사랑도 더하고 싶다. 살아가는 것이 항상 기쁘지만은 않는 이 세상에서, 어쩌면 불행과 슬픔이 더 많을 지도 모르는 이 세상에서 끝까지 에 몰두하기를 바라면서 그 사이에 예술과 사랑이 더 큰 힘이 되길 바라면서   

 

네가 보는 그림은 내가 보는 그림과 달라. 미술 책은 그걸 또 다른 위치에 놓고, 미술관 기념품 가게에서 카드를 사는 여자는 또 전혀 다른 걸 보겠지. 우리와 다른 시대의 사람들―4백 년 전에 살던 사람들, 4백 년 후에 살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누구에게도 절대 같은 느낌으로 다가가지 않을 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로 심오한 느낌을 받지 않겠지, 정말로 위대한 그림은 아주 유동적이어서 여러 각도에서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속으로 스며들지, 독특하고 아주 특정한 방식으로 말이야. 네 거야, 네 거. 난 널 위해서 그려졌어. - P461

웰티는 운명적인 물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어. 미술상과 골동품상은 모두 그런 걸 알아보지. 들어오고 또 들어오는 물건들. 파는 사람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그건 단순한 물건이 아닐 거야. 어떤 도시고, 어떤 색깔이고, 하루 중 어느 순간이지. 사람의 운명이 걸리는 못 같은 거야. - P462

이 세상의 위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위엄을 지키는 것,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위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자신을 처음으로 흘깃 보고, 그 속에서 스스로를 꽃피우고 꽃피우는 것. - P466

만약 우리를 정의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는 얼굴이 아니라 우리의 비밀이라면, 그렇다면 나를 삶의 표면 위로 떠오르게 하고 나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하는 비밀은 바로 그 그림이었다. 그림은 거기에, 내가 쓴 공책의 모든 페이지에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했다. 꿈과 마술, 마술과 망상. ‘통일장이론’. 비밀에 관한 비밀. - P470

새와 화가, 그림과 감상자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을 건너 나를 부르는 소리가, 호비 아저씨가 말했던 것처럼 통로에서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들려오는 쉿 소리가 너무나 잘 들린다. 정말로 아주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부름이다. - P473

우리에게 혼잣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이든 중요하다. 우리가 절망 속에서 스스로에게 노래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 중요하다. 하지만 그림은 또한 우리가 시간을 초월하여 대화를 나눌 수 있음을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 P480

우리가 죽어갈 때, 우리가 유기체에서 생겨나 굴욕적이게도 다시 유기체로 돌아갈 때, 죽음이 건드릴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영광이고 특권이다. 지금까지 이 그림에 재앙과 망각이 뒤따랐다면―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이 불멸인 한 (그것은 불멸이다) 나는 그러한 불멸성에서 밝게 빛나는, 변치 않는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며, 계속 존재하고 있다.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불 속에서 구해내고, 사라졌을 때는 찾으려 애쓰고, 보존하고, 구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아름다운 것들을 문자 그대로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고 시간의 폐허 속에서 다음 세대를 향해, 또 그 다음 세대를 향해 큰 소리로 멋지게 노래를 불러온 사람들의 역사에 나 자신의 사랑을 더한다. - P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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