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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노트 ㅣ 쏜살 문고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지음, 정지영 옮김 / 민음사 / 2018년 8월
평점 :

<회색 노트>는 두 10대 소년이 벌인 일주일간의 가출 사건을 이야기로 다루고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작가를 처음 만났는데, 그를 영원한 현대인으로 남을 작가라 칭하는 알베르 카뮈의 추천사를 보며 그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생각보다 얇은 책이어서 금방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는데,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전체적인 가출 사건에 대한 내용보다는 회색 노트에 담긴 자크와 다니엘의 편지가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것에 담긴 그들의 말과 표현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그 어떤 비유보다 확실하게 내게 보여주었고, 덕분에 10대여서 느낄 수 있는 그때만의 불안과 고민을 다시 느껴보기도 하고, 서로를 향한 그들의 성숙한 마음에 감동받기도 했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새 자크와 다니엘이 주고받던 편지들의 수취인이 되어 날 향해 쏟아지는 말들에 따뜻해지기도 했다가 따끔해지기도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이 말을 되풀이해야겠어. 너는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너를 멸시하는 외부 세계의 사람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너만을 생각하고 모든 일을 너와 똑같이 그리고 너와 함께 느끼는 어떤 사람(나)을 위해서 살고 있다고! (74p)
아! 나의 마음이 메마르지 않기를! 나는 생활이 나의 마음과 감각을 무디게 할까 봐 두려워. 나는 나이를 먹고 있어. 이미 ‘하느님’이라든가 ‘정신’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커다란 관념들이 이전처럼 가슴속에서 뛰지 않는 느낌이야. 그리고 모든 것을 갉아먹는 ‘회의’가 때때로 나를 삼켜 버려. 아! 어째서 이성으로 따지는 대신에 우리 마음의 온 힘을 다해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해!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은 채 위험을 향해 뛰어드는 젊음의 의기가 부러워! (76p)
내 마음은 너무 부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아! 나는 이 끓어 넘치는 파도를 이 종이 위에다 쏟을 수 있는 한 쏟아볼 생각이야.
나는 고민하고 사랑하고 희망하기 위해 태어났고, 또한 희망하고 사랑하고 고민하고 있어! (82p)
자크의 아버지인 티보 씨나 비노 신부와는 다르게 퐁타냉 부인은 끝까지 자신의 아들을 믿었으며, 그 믿음은 남의 말이나 세상의 시선들에 무너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주고받은 회색 노트를 뺏거나 그 뺏은 노트를 같이 훔쳐 읽어보던 보통의 어른들과는 달리 퐁타냉 부인은 끝까지 노트를 읽어보지도 않았다. 아들의 사생활을 끝까지 지켜주며 당당하게 다른 어른들에게 말하던 퐁타냉 부인의 말이 인상 깊다.
“여러분, 저는 단 한 줄도 읽지 않겠어요. 그 애의 비밀이 여러 사람 앞에서, 그 애 모르게 폭로되고, 그 애에게는 변명할 여지조차 남겨 주지 않다니요! 전 그 애에게 이런 대우를 받도록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38~3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