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p. 어느 틈에 어디에서 솟구쳤는지 하얀 덩어리가 계수나무가지와 잎사귀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움직인다. 조용했다. 새도 포기하고 지저귐을 그만두었나보다. 유리창을 열고 코를 멀리 밀듯이 얼굴을 내밀고 안개 냄새를 맡는다. 안개 냄새에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하얀색이 아니라 초록색일 것이다.
143p. 모든 잎사귀가 떨어지는 겨울이 되면 전망은 일변한다. 낮아진 햇살이 설계실 안쪽 깊숙이 미끄러져 들어와 마룻바닥을 비추고 책상과 의자가 긴 그림자를 만드는 풍경이 떠오른다.
159p. 감자를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흙은 여름의 아침 햇살을 받아 금방 하얗게 말라간다. 오랜 시간 양지바른 곳에서 볕을 쪼이고 있던 새끼 곰 등에 얼굴을 가까이 갖다대면 이런 향기로운 냄새가 날 것 같았다.
173~174p.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같은 것은 놀랄 만큼 빠른 단계에 완성돼. 태아는 그 손가락으로 뺨을 긁기도 하고 열었다 닫았다,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손가락을 움직여. 건축에서 세부라는 것은 태아의 손가락과 같아. 주종관계에서의 종이 아니야. 손가락은 태아가 세계에 접촉하는 첨단이지. 손가락으로 세계를 알고, 손가락이 세계를 만들어. 의자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야. 의자를 디자인하다 보면 공간 전체가 보이기도 하지."
180p.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은 재미가 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은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되고 나서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280p. 8월 끝 무렵이 되자, 아오쿠리 마을의 여름은 서둘러 돌아갈 채비를 시작한 것 같았다. 낮에는 한여름 기온에 가까워도, 저녁 나절에는 바람이 숲을 지나가면서 햇살의 흔적을 빠짐없이 지워간다. 아침에 산책 나가는 선생님도 얇은 카디건을 걸치게 되었다.
332p. 일단 홍차를 끓이기로 했다. 팔팔 끓는 물로 포트와 컵을 데우고 우유를 유리병에 넣고 다시 한 번 주전자를 불에 올려 물을 끓인다. 기온이 낮아지면 주전자가 끓는 소리가 반가워진다.
337p. "아마도. 비를 맞거나, 태양에 이글이글 타거나, 강한 바람을 맞으면 그것을 견뎌내는 것만도 벅찼지. 그러나 움막이라면 아주 잠시라도 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불을 멍하니 보는 여백 같은 시간이 있었을 거야. 인간에게 마음이 싹튼 것은 그런 시간이 아니었을까."
339p. 망설이지 않는 기세로 장작 사이를 불꽃이 핥아간다.
355p. "겨울이 조금 더 기다려줬으면 좋겠어. 올가을은 유난히 예쁘니까."
387p. 차가 아오쿠리 마을에 들어섰다. 음악은 조금 전에 끝났다. 숲의 하얀 바닥에 쓸쓸한 겨울나무들이 시커멓게 서 있었다. 지금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어린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는 봄이 아니라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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