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그친 뒤에야 발자국이 드러나는 것처럼 어떤 비밀은 모두가 잠든 새벽에 실체가 드러나기도 하니까. p.69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하나를 더 가진다. 약점은 연약한 부분이라 당연히 상처 입기 쉽다. 상처받는 부위가 예민해지고 거기에서 방어를 위한 촉수가 뻗어 나오는 것이다. p.112약자는 위로받기보다 차별이 없는 존중을 원한다. 결점이 있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특별한 배려를 받는 게 아니라, 다수와는 다른 조건을 가졌을 뿐 동등한 존재로서의 권리를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p.115그 시절 우리에게는 수많은 벽이 있었다. 그 벽에 드리워지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도 뚜렷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바위에 부딪쳐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고물처럼 모두의 시간은 여울을 이루며 함께 흘러갔다. p.193드라마에서는 어차피 결말이 화해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갈등의 수위를 높여도 된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언제나 화해가 결말이 되지는 않는다. p.211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었다. p.281이 나이가 되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젊지만 생각보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게 입버릇었고 나도 그 말에는 이의가 없었다. p.325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p.335오랜 친구인 김유경과 김희진. 오랜 시간을 함께했지만 절친한 친구도 아닌 그저 소식이 끊어지지 않은채 계속 함께하고 있는 관계.소설가인 김희진의 작품을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던 김유경은 그녀의 첫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읽으며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자신의 추억을 회상한다. 대학에 입학해 신입생이 되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그 곳에서 만난 김희진과 룸메이트들. 결혼해서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며 대학을 졸업 한 여학생들은 가정주부가 되거나 판매원으로 취직하는 것이 너무나 일반적인 1977년의 그 시절로.서평단으로 신간을 만나면 아무런 정보없이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감사하다. 게다가 은희경 작가님의 7년 만의 장편소설은 감사한 마음과 함께 읽기 전부터 두근거렸다.너무나 현실적인 1970년대를 묘사한 은희경의 글은 그래서 읽는 내내 가슴을 먹먹하고 싸하게 만들었다. 현실적으로 써내려간 글들은 그 시절을 살아온 그녀들의 인생이었고 그래서 읽는 내내 슬펐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오빠들의 학업을 위해 자신의 학업은 당연히 포기해야 했던 그녀들.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했을 때 상대방에게 "어쩜 한마디도 지지 않냐."는 말을 듣는 그녀들. 헤어짐의 이유는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책망하는 그녀들.그녀들이 모인 작은 사회에서 자신의 욕구만을 충족하고, 다른 사람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교정하고, 꼭대기에서 군림하고 싶어하거나, 휩쓸리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자신의 색을 죽이는 이들이 있다. 서로 다른 그들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친다.기쁜 마음으로 시작한 이 책은 읽는 내내 가슴이 싸해져갔다. 너무나 현실적인 1970년대를 묘사한 은희경의 글들은 1970년대를 살지 않았지만 지금의 우리의 삶과 다른듯 다르지 않음에.먼 훗날 미래라고 부르게 될 그 날. 나는 빛나던 과거를 자연스럽게 뒤로 하고 계단에서 내려올지 빛나던 그 시간을 계속 잡고 내려오지 않으려 발버둥칠지 모르겠지만 추억할 수 있는 시간들 모두 반짝 반짝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