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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드롭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1월
평점 :
여행 드롭
무슨 뜻일까 한참을 생각하고 상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원제를 찾아보게 되었다.
旅ドロップ
상승하고 들뜨는 기분을 느끼는 여행이라는 단어에 'DROP'이라는 분위기를 깨는, 낙하의 느낌이 나는 단어를 조합한 이유가 무엇일까 작가의 의도가 의문스럽다가, 이 ‘DROP’이란 하강하는 의미가 아닌, 사탕을 뜻하는 단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공장에서 사탕이 만들어질 때 방울 방울 떨어져 모양이 잡히는 그 '드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떠올리지 못한 짧은 영어실력에 다시금 한탄하면서도 어린시절 색색이 가득차 있던 깡통 사탕을 떠올린다. 하루에 두어개쯤 먹게 정해져 있어 오늘은 무슨 색을 먹을까 매일 작고 즐거운 고민을 하던 기억이 났다. 작가 또한 깡통 안의 여러 색 사탕처럼 여러 번의 여행에서 남은 달콤한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먹으며, 하나 하나의 에피소드를 써내려 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에쿠니 가오리 (江國香織)는 ‘냉정과 열정사이 : Rosso (2001)’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소설가이다. 1987년 동화작가로 시작하여 많은 소설들을 출간하며 인기를 얻었고, 2004년 ‘울 준비는 되어있다 (號泣する準備はできていた, 2003)’로 대중적인 호소력을 가진 소설이나 단편소설에 수여되는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결혼 전 오래 만나온 아내와 한참을 연애하던 시절, 함께 나누어 읽었던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사이 : Rosso & Blu)는 그때의 우리의 현실과 일정 닮아있어 너무도 인상깊게 남았고, 다케노우치 유타카와 진혜림이 연기한 영화 또한 개인적으로는 웰메이드 였기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었다. OST마저 영상에 잘 녹아 CD를 구입하여 한참을 들었던 시절도 있었고, 얼마전에는 바이닐 출시 소식에 추억을 구입한다는 생각으로 한장 구입해서 듣기도 했다. 아쉽게도 기대했던 만큼의 아날로그적 매력은 없었지만 큼직하게 두오모를 담은 일러스트 커버만은 꽤 마음에 들었다. 아내 또한 에쿠니 가오리의 큰 팬이 되어 ‘도쿄타워’, ‘홀리가든’, ‘울 준비는 되어있다’ 등 여러 권의 책이 아직 책장에 자리잡고 있으며, 관심작가로 여기저기 등록되어 있어 그의 신간 출시 소식에도 민감하다.
이번에 출간된 ‘여행드롭’은, 2016년부터 2019년까지 JR큐슈의 차내잡지 ‘Please Please’에 36회 연재된, ‘여행’을 테마로 한 소박한 느낌의 37편의 여행 에세이와 3개의 시를 수록한 모음집으로 원서를 출판한 소학관(小學館)은 - 에세이의 대가가 쓴 작은 보물 같은 책 - 으로 소개하고 있다.
얼마 만큼의 거리를 얼마나 오랫동안 떠나오든 그 일정이 ‘여행’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탈일상적이어야 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 탈일상을 위해서는 집을 일단 ‘버릴’ 필요가 있다.
일상을 벗어난다면 예기치 않은 비가 내린다 해도 거추장스러운 우산과 젖어버린 신발의 불쾌함, 습하고 눅눅한 지하철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제대로 마르지 않을 빨래와 저녁거리 장만 또한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따끈한 온천물에 몸을 푹 담그고, 차분하게 내리는 빗소리를 좋은 배경음악으로 산속의 젖은 나무들이 풍기는 초록의 향기를 한껏 즐기기만 해도 되는 것이다. 티오프시간에 맞춰야 하는 골프여행이나 출조시간을 지켜야하는 낚시여행처럼 정해진 일정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 일정의 여행이라면 개인적으로도 일상을 벗어났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한다.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이든 시간에 매여 있다는 것 자체가 일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이다. 무릇 내가 원하는 여행이란 저자의 표현처럼 하고 싶을 때 온천을 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간에 느긋하게 하는 것이다.
같은 여정의 동반자가 몇이든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개인에게는 각각의 고유한 감흥이 남을 것이다. 그 얼마나 크고 위대한 광경을 마주하였든 가장 좋았던 것은 비행기에서 본 후지산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또 그렇게 말하던 어머니의 모습으로 기억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보다 거리를 배회하는 들개들이 더 인상깊게 남을 수도 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희미해 질수록 여행의 추억은 더더욱 개인적인 것만이 남게 된다. 여러 장소에 가서 많은 것을 보고 체험하며 그것을 자신에게 새긴다는 것은 드넓은 세상에 하나의 점과 같은 존재로서 살아가며 가지는 당연한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여행이 알차고 즐거울수록 여정의 남은 일수를 세며 아쉬워한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 마주할 머리 아픈 일들을 떠올리며 한숨짓기도 하지만 막상 집에 들어오는 순간 편안하고 푸근한 느낌을 받으며 안도하게 된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하여 떠나는 것이라고들 한다. 아마도 일상의 소중함을 한번 더 깨닫고 그 일상을 보다 충실히 보낼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여러가지 공감이 가는 단상들을 편안하게 읽으며 나도 다음 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PS. 저자의 진지한 사관(史觀)은 아니겠지만, 집과 땅, 무덤에 집착하지 않았던 조상들이 펑키하고 그루비하다고 쓴 대목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겠지만. 얼마전 극장에서 ‘파묘’를 보고 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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